권기철 화가
며칠 전 작업실 우편함에 가을 햇살이 쨍쨍히 묻은 소포 하나가 왔다. 선홍색 봉투를 열었다. 가방이다. 내가 쓴 것 같은, 아주 정확히 눈에 밟혀 오는 큰 글씨 하나가 가방에 쓰인 게 보인다. 이쪽저쪽 어깨에 메는 동작을 반복하다 이런 종류의 백의 이름을 들은 것 같아 지인에게 물으니 에코백이란다. 윤택한 환경의 차원에서 만든다는 에코백.
그제야 나는 "이건 내 글씬데"라며 혼잣말을 하니 지인이 "서예도 하시나요. 화가님이?"라고 묻는다. "글씨도 가끔 그림처럼 그리죠 뭐. '대구문화' 월간지 제호도 제가 쓴 걸요"라고 답한다.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이 지인의 얼굴에 보인다.
가끔 캘리그라피 의뢰를 받는다. 가방에 박혔던 그 글씨는 몇 해 전에 쓴 것이었다. 한국무용가에게 착 달라붙는 글씨가 뭘까 고민하다 공연에서 춤추며 비상하는 무용수를 설정 해 두고, 며칠을 곰곰이 생각하다 쓴 한자 '날 비(飛)'다. 그걸 폼나게 가방에 디자인한 것을 친구가 보내온 것이었다. 노란 가을볕처럼 따뜻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에코백은 심플하고 디자인이 간소하다. 거기에 더해 크기가 적절하고 촉감 또한 좋다. 무용수의 흑백사진이 전면에 배치돼 시선을 끌고, 무용수의 몸짓과 옷자락은 비상하는 학처럼 고고하다. 뒷면에는 내가 쓴 한자, '飛'가 크게 쓰여 있다. 메고 다니면 이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더욱 사각사각해질 것 같은 느낌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한국무용가 백경우이고,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무용수의 누나인 친구 백소영 작가다. 누나 역시 작가이니 추측컨대 가방의 디자인 역시 그가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나는 가끔 공연장에서 누나인 그를 만나면 화기애애해진다. 이런저런 스치는 농담이나 일상적인 말들이 오가지만, 따뜻하게 섭취할 게 있는 건 분명하다. 우선은 그를 만나면 예술의 좋은 동반자를 만나는 기분이 든다.
누군가는 "세상의 모든 누이들의 애정이 비슷합니다"라고 하겠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시선으로 봐도 그는 분명 동생의 예술에 별스러운, 깊은 모성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무용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 자신의 작품으로 변환하기도 한다. 후견인으로 헌신하며 전통무용을 이해하는 깊이는 농밀하고 무한해 보인다. 무용수가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느 해 나는 무용수 백경우의 공연을 본 적이 있다. 무대 바닥에서 슬며시 들어 올린 오른쪽 버선발의 절묘한 커브 형상, 어깨의 각을 품위 있게 세워 느리게 날리던 새하얀 옷자락, 그리고 한 호흡도 흩어질 수 없도록 하는 몸의 몰입은 지금도 나에게는 정지 화면으로 멈춰있다. 언젠가 무용수를 만나면 묻고 싶다. 당신에게 누이는 누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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