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애국지사, 그들은 달랐다] 義로운 자여! 그대는 대한 여성이니라

입력 2021-10-15 15:30:00 수정 2021-11-19 16:38:14

독립운동사상의 홍일점 여걸로 불린 남자현
독립운동사상의 홍일점 여걸로 불린 남자현

유학 잔재로 한때 한국 여성에게 소위 '삼종지의'(三從之義)가 강요됐다. '어릴 때는 부모, 시집 가면 남편, 남편 죽은 뒤는 아들을 따른다'는 도리였다. 하지만 국난 앞의 한국 여성은 독립의 '의리'(義理)를 좇아 홀로, 또는 부모'자식과 함께 독립투쟁의 운명공동체가 됐으니 독립운동사에 숱한 여성 투사가 나올 만했다. 그들은 의병에서부터 계몽활동, 무장 의열(義烈)투쟁까지 희생의 삶을 살고 순국도 서슴치 않았다. 뒷날 독립유공 서훈 여부를 떠나 국가보훈처 공훈록 등을 통해 오늘날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 일부라도 살펴볼 수 있어 다행이다.

남자현 별세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남자현 별세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군자금 모금·폭탄 투척 등 맹활약


경북 영양 출신 남자현(南慈賢) 독립운동가는 일찍부터 '혁명의 어머니', '전율할 할머니', '근대 한국의 여걸', '독립운동사상의 홍일점 여걸' 등으로 불렸다. 그는 지난 2019년 유관순 열사의 훈격이 종전 독립장에서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승격되기 전까지 유일하게 대통령장을 서훈받은 대표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의병에 투신한 남편(김영주) 사망 뒤, 1907년 정미의병 때 아버지(남정한)의 의병활동을 도왔다. 1919년 서울에서 31만세운동도 벌였고 3월 9일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 등 독립운동단체에 참여했다. 특히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 암살 계획과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 수감 김동삼 투사 구출작전 시도, 만주방문 국제연맹조사단에 무명지의 단지로 쓴 혈서인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란 글씨를 전달하려 시도했고, 만주파견 부토 노부요시 일본 전권대사 처단계획 등에 나섰다가 투옥 중 고문에 시달리다 단식 끝에 석방돼 곧 숨졌다.

여성 의병장 윤희순
여성 의병장 윤희순

여성 의병에는 윤희순(尹熙順·애족장) 의병장이 있다. 그는 시아버지(유홍석·애국장)와 남편(유제원), 시아버지 집안의 인물인 유인석(대통령장) 의병장의 영향을 받아 '안사람 의병가'와 '의병군가', '병정가' 등을 보급했다. 특히 1907~1908년 의병운동 때는 강원도 여우천 골짜기에서 여자의병 30여명의 부대를 이끌고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폈다. 1911년 4월 만주로 망명, 시아버지와 남편의 독립운동을 돕다 1935년 순국했다.

관공서 폭탄투척 안경신
관공서 폭탄투척 안경신

여성 투사로, 임신 7월 몸으로 관공서에 폭탄을 던진 안경신(安敬信·독립장)도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 참여로 1개월 구류를 살고 1920년 상해로 망명해 그해 8월 미국의원단 방한(訪韓)에 맞춰 8월 3일 평남경찰국청사에 폭탄을 던져 평양시내를 진동시켰고, 평양도청과 평양경찰서에도 투탄했으나 실패했다. 1921년 3월 모진 고문과 악행 끝에 붙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 평양복심법원의 징역 10년형 선고로 옥살이를 했다.

맹인 독립운동가 심영식
맹인 독립운동가 심영식

특히 어릴 적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는 심영식(沈永植·애족장)도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10월형을 받아 서대문감옥에서 수감됐다. 또 투옥 중인 1920년 3월 1일 서대문감옥 여옥사 8호 감옥에서 유관순·임명애 등과 옥중 독립만세운동을 펼쳤고, 고문으로 고막을 다쳐 평생 고생을 했다. 그리고 당시 유관순 등과 감옥에서 불렀다는 '대한이 살았다'는 노래가 아들(문수일)을 통해 2019년 언론보도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무장 독립운동가 조신성
무장 독립운동가 조신성

평양에서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나섰다 만세운동 연루로 사임한 조신성(趙信聖·애국장)은 대한독립청년단을 만들어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와 관공리 처단, 관공서 파괴 등 무장에 바탕을 둔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처럼 맹렬한 활동으로 그는 '가슴에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를 품고 활약'한 여성 독립투사로 그려졌다.

계몽운동가 최용신
계몽운동가 최용신

함남 덕원 출신의 최용신(崔容信·애국장)은 평생을 교육계몽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인물로, 심훈의 소설 '상록수' 속의 실제 주인공이다.

1931년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천곡(泉谷) 즉 샘골에서 농촌교육을 시작하여 1934년 봄까지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다 1934년 3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병으로 귀국했으나 이듬해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1909년 태어났으니 26세의 삶에 불과했다.

여성해방운동가 정칠성
여성해방운동가 정칠성

◆서훈의 영광은 없어도


1897년 대구 출생의 정칠성(丁七星·미서훈)은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금죽(錦竹) 이름 대신 칠성(七星)으로 바꿔 기녀 생활을 벗고 1920년대 사회주의계열 여성운동과 사회운동, 여성노동운동을 선도했다. 여성해방을 위해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 신간회의 중진으로 뛰었다. 특히 정칠성은 이춘수(李春壽) 등과 고향 대구의 사회운동에 크게 기여해 당대를 대표할 여류 정책(政客)으로 '원산 김마리아, 서울 황애시덕, 대구 정칠성'으로 꼽힐 정도였다. 광복 뒤 전국부녀총동맹 의장 등으로 뛰던 정칠성은 1948년 월북 때까지 여성 노동자 등 여성의 권익 대변과 해방운동에 힘썼다.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백마 탄 여장군 김명시

경남 마산에서 1907년 태어난 김명시(金命時·미서훈)는 1919년 3·1만세운동 때 어머니(김인석)를 잃고 오빠(김형선), 남동생(김형윤)과 함께 민족운동에 뛰어든 독립투사로, 흔히 '백마 탄 장군'으로 널리 알려진 여성이다. 1925년 가난으로 배화여학교를 중퇴, 그해 9월 모스크바 유학생으로 뽑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다닌 그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1932년 귀국, 활동 중 붙잡혀 평양형무소에 7년을 복역했다. 이후 1942년 7월 창설된 조선의용대원에서 일본군과 무장 투쟁하며 당시 여성 의용군 부대를 지휘한 여장군으로 변신했다. 광복 뒤인 1948년 부평경찰서에서 숨을 거뒀다.


평북 삭주 출생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아버지(이태화) 등의 영향으로 1917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때부터 비밀결사 가입 등으로 저항했고 이후 독립운동으로 당시 국내 언론에 '독립군 여걸'로 알려진 이관린(李寬麟·미서훈)도 잊힌 독립투사이다. 1919년 3월 만세운동 참여, 1920년 신안주재소 산하 출장소 습격과 순사 사살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만주에서는 오동진(대한민국장) 지휘 아래 광복군총영 경리부장으로 활동하며 '독립군 여걸' 등으로 불렸다. 광복 이후 중국에 남아 중국 정부로부터 '혁명 할머니'로 평가됐고, 중국에 자식을 두고 북한에서 1985년 숨을 거두고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남자현묘 입석 보도 조선중앙일보

◆여성 독립운동가 얼마나 되나?


올해 10월 현재, 국가보훈처 공훈록의 독립유공자는 모두 16,932명인데 2021년 8월 15일 기준 국가보훈처의 연도별 여성 포상자수는 모두 540명에 이른다. 이는 전체 서훈자의 3.2%에 겨우 그치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문재인 정부에서 여성과 학생 독립운동유공 기준 완화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즉 1962부터 2017년까지 여성 독립운동가는 전체 포상인원(14,830명)의 2%인 296명이었으니 2018년부터 244명이나 늘어난 셈이다.

남자현묘 입석 보도 조선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