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최고 서예가 김태균 선생이 새로 써 부착
'전국 서원의 표본' 옛모습 그대로
우리나라 서원 규약(원규·院規)의 효시인 영주 이산서원(伊山書院·경상북도 기념물)이 150년 만에 전체 11개 건물이 이건 복설됐다. 퇴계 이황이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경북 유형문화재 제417호) 판각의 진본을 보관했고 퇴계 이황이 서원의 기문과 원규를 직접 지어 전국 서원의 표본이 됐다. 퇴계의 정신과 사상을 집대성한 이산서원의 역사를 따라가 봤다.
◆이산서원, 1558년 창건
이산서원은 이산면 원리(院里, 지금의 휴천1동 속칭 구서원)에 1558년(명종 3) 영천(영주의 옛 지명)군수 안상이 퇴계 이황의 자문을 받아 창건했고 강당을 경지당(敬止堂), 동재를 성정재(誠正齋), 서재를 진수재(進修齋), 문을 지도문(志道門), 대를 관물대(觀物臺)라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명명했다. 1572년(선조 5) 묘우를 세우고 이황의 위패를 봉안했고 1574년(선조 7) 사액을 받은 서원이다.
1614년(광해군 6) 이산면 내림리로 이전했고 1871년 고종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36년 경지당과 지도문만 복원했다. 2008년 영주댐 건설로 이산서원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영주시가 현재의 이산면 석포리에 최초의 모습으로 이건 복설했다.
위치는 바깥수구리 전방 내성천변에 방형일곽을 구성하고 남향하고 있다. 경지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굴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 구성은 가운데 4칸 마루방을 둔 중당협실형이고, 양측 온돌방 후면에는 각기 반침을 두었다.
기단은 자연석을 높직하게 쌓고 중앙에 계단을 내어 오르내리도록 했다. 초석은 3종류를 혼용하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마루방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종량위는 소로 3개와 초각첨차를 끼운 파련대공으로 종도리, 장혀를 결구시켰고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이었다.
기문(記文)과 원규(院規)는 퇴계 이황이 짓고, 묘우상량문(廟宇上樑文)은 백암(栢巖) 김륵이, 봉안문(奉安文)은 소고(嘯皐) 박승임이, 이건상량문(移建上樑文)은 창석(蒼石) 이준이, 이건기(移建記)는 군수 조찬한이 지었다.

◆성학십도
이산서원에는 퇴계 학문을 집약한 성학십도의 판목을 보관해 와 더욱 유명하다.
성학십도는 퇴계 이황이 68세 때 평생의 학문을 정리해 새로 등극한 어린 선조에게 지어 올린 것으로, 본래의 명칭은 진성학십도차병도(進聖學十圖箚幷圖)로 퇴계문집 내집과 퇴계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진(進), 차(箚), 병(幷), 도(圖)의 글자를 생략하고 '성학십도(聖學十圖)'라 불렸다.
구성은 1장 태극도(太極圖), 2장 서명도(西銘圖), 3장 소학도(小學圖), 4장 대학경문(大學經文), 5장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6장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7장 인설도(仁說圖), 8장 심학도(心學圖), 9장 경재잠(敬齋箴), 10장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이다.
성학십도는 병풍용과 서적용으로 판각됐다. 성학십도의 판목은 임진왜란 이전에 영주에서 판각했다가 산실된 후 1750년 전후에 다시 판각한 병풍용 판목으로 추정된다. 국내 유일본인 이 판목은 퇴계의 성심이 담겨있는 서적으로 퇴계의 위패를 최초로 봉안한 이산서원에서 판각해서 수장해 온 점이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

선조는 성학의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10가지 그림으로 만들어 올린 성학십도를 병풍으로 만들어 곁에 두고 학문과 인격을 길렀으며, 후에 숙종조에는 책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산서원에 소장하던 5매의 판목(앞뒤 10판)은 대원군 때 서원이 훼철되자 서원을 관리하던 문중이 돌아가면서 관리하다가 형편이 여의치 않자 최종적으로 연암 김씨 괴헌고택에서 오랫동안 관리해 오다 2004년 영주시에 기증, 현재 소수서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영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문예를 숭상하던 선비고장이지만 새로 부임한 안 군수가 인재양성, 교학 부흥에 뜻을 두고 선비들의 뜻을 수렴해 이산서원이란 학사(學舍)를 건립했던 것이다. 이때 경비나 노역을 일체 민간에게 부담하지 않았다.

◆퇴계와의 인연
이산서원은 영주의 첫 서원으로 명종 13년(1558)에 군수 안상이 관사(館舍)가 없어서 선비들이 모일 장소가 없자 퇴계의 자문을 받아 창건했다. 도산서원과 같은 해인 1574년(선조 7) 임금의 사액을 받았다. '이산서원'이란 이름은 이 마을의 지명이 '이산'이었기 때문이다. 남간재(번고개) 뒤편에 있는 이 마을은 현재 '서원마'로 불리고 있다.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는 퇴계가 직접 썼고 원생들이 지켜야 할 행동지침과 공부하는 방법, 학문의 목표 등을 소상하게 담은 원규도 만들었다. 이 원규는 우리나라 서원 원규의 효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아 전국적인 모델이 됐다.
또 퇴계는 주 건물인 경지당을 비롯해, 동재인 성정재, 서재인 진수재, 관물대, 지도문 등 이름도 손수 붙였다. 거기에다 이산서원은 퇴계 학문을 집약하는 성학십도의 판각 진본을 보관할 만큼, 퇴계와의 인연이 깊다. 그래서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 못지 않게 퇴계의 뜻을 기리는 서원으로 유명하다.
퇴계의 저명한 제자들은 대부분 영주 소수서원 출신이다. 퇴계가 소수서원에서 제자를 기르고, 이산서원을 설계하고 만들었다면,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에 후학들에 의해 지어진 서원이다. 그래서 소수서원에는 그의 제자가 있고, 이산서원에는 그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는 반면 도산서원에는 그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건 복설
이산서원이건복설추진위원회(회장 김백)는 지난 13일 이산면 석포리에서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장욱현 영주시장, 도·시의원, 경북북부지역 유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산서원 복설 준공식을 갖고 배향된 선현에 대한 제향을 봉행했다.
영주시는 2012년 이건 계획을 확정하고 사업비 24억 원을 투입, 기존에 있던 경지당과 지도문을 이건했다. 또 발굴 용역 결과와 사료를 근거로 존재가 확인된 사묘, 숙소인 성정재, 진수재, 학당인 양정당, 누대인 관물대 등을 모두 복원했다.
그동안 퇴계 이황 선생만 배향했지만 이번에 복설되면서 유림들의 공의를 모아 이산서원의 설립과 유지에 공이 큰 소고 박승임과 백암 김륵 선생을 추배해 함께 제향을 봉행했다.
장욱현 영주시장은 "이산서원의 이건 복설 준공식과 봉안고유제 봉행을 시작으로 그동안 끊어졌던 서원의 전통을 되살려 원래 역할인 존현양사(尊賢養士)의 책무를 다하게 됐다"면서 "영주의 선비정신을 함양하고 참된 인성을 기르는 계기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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