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달라스 클락 보란 선교사는 1951년 10월 17일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1920년생이니 막 서른을 넘겼다. 그가 입국할 때는 6·25전쟁으로 온 산하가 생지옥이나 다름없던 시절이었다. 전쟁 피난민과 고아가 넘치고, 먹을 것과 살 집도 없었다. 질병까지 겹쳐 고통이 극심해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던 암흑의 나날이었다.
캔자스주 한 농가의 장남이던 그는 대학 시절 일본 도발로 2차대전이 일어나자 종교를 이유로 입대 대신 졸업 뒤 민간 공중봉사회에서 대체 복무를 했다. 그랬던 그가 전쟁터에 온 까닭은 인도적 목적이었다. 그가 소속된 메노나이트 종파 중앙재단이 전쟁으로 힘든 한국인의 구제와 교육 등의 사역을 결정한 결과였다.
그의 뒤를 이은 선교사들은 1971년 철수 때까지 80명에 이르렀고, 이들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거나 헤어진 고아와 피난 한국인을 돕는 활동을 폈다. 특히 대구에는 이 재단의 한국지부 사무실이 설치됐다. 이들은 인근 경산에 땅을 마련하여 구제 사역과 남자 고아 직업훈련학교까지 세워 맡은 일을 수행했다.
대구에 한국지부를 둔 배경은 전쟁 피난민이 이 지역에 몰렸고, 지리 위치 등에서 봉사 사역에 적합했던 곳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1951년 부산에서 출발해 1953년 대구와 경산에 거점을 두고 구제 활동 등을 벌인 선교사 일행이 전쟁 참화 속에 남긴 행적과 20년 활동은 평가받을 만하지만 이를 살피는 일조차 없었으니 미안할 뿐이다.
선교사 활동 가운데 구호품 배급 같은 절박한 활동도 돋보이지만 장차 살길을 찾을 수 있도록 전쟁고아에게 숙식과 의복을 제공하고 기숙사 학교를 통한 직업 교육과 배움의 기회를 주는 데 힘을 기울인 사실은 기릴 만하다. 또 경산의 농장 운영과 젖소 보급처럼 소위 자활(自活)의 길을 튼 일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도 일맥상통해 더욱 그렇다.
광복 이후 혼란에 이은 전쟁으로 모두 힘들고 어렵던 시기에 대구와 경산에 본부를 두고 80명의 선교사가 벌인 한국인 돕기 사연을 그들 입국 70년, 철수 50년 만인 지난 5월 나온 책(『메노나이트 선교사 이야기』, 손상웅)으로나마 알게 돼 다행이다. 이왕이면 대구경북 현대사 자산이 될 수 있도록 이들의 행적을 달리 다룰 일을 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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