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 전 대전MBC 대표
2010년 12월 17일, 크리스마스를 일주일가량 앞두고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수도 투니스 시청 앞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청년이 자신의 몸에 가솔린을 끼얹고 불을 붙인 순간 몸 전체가 타 들어갔기 때문이다.
놀란 시민들이 급하게 불을 끄려고 했으나 이미 시간은 너무 늦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전신에 입은 심한 화상으로 18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사망한 사람은 무함마드 부아지지,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부아지지에게 마땅한 일자리는 없었다. 길거리에서 과일과 채소를 파는 것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후진국일수록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들이 많은 법이다. 노점상 위에 군림하는 것은 경찰이었다.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노점상을 몰아내면 뒷돈이 들어오고, 그 뒷돈은 더 나은(?) 생활을 가능케 하는 구조화가 되어 있는 것이다. 부아지지는 압수당한 과일과 채소를 돌려달라고 경찰에 요구했으나, 돌려받기는커녕 돌아온 것은 구타뿐이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부아지지는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알려진 대로 부아지지의 죽음은 튀니지 전역의 반정부 시위로 이어졌다.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빼앗긴 스물여섯 살 청년은 자신의 몸을 불태워 구조적 부패를 고발했다. 1987년 이후 23년 동안 집권하던 벤 알리 대통령은 차기 대선에 불출마를 선언하고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지만, 수많은 부아지지의 저항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섯 번의 선거에서 두 번은 유권자 100%의 지지라는 비현실적인 지지율을 만들어냈고, 나머지 세 차례 선거에서도 99.5%, 94.5%, 89.6%라는 믿기 어려운 지지율을 얻었던 벤 알리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겨우 도망쳐 목숨을 건졌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반부패·반독재 시위는 '자스민 혁명'이라는 이름을 얻고 인근 리비아와 이집트, 예멘, 시리아까지 들불처럼 번져갔다.
리비아에서는 42년간 장기 집권을 하던 카다피 정권이 무너졌다. 여성 경호대와 특이한 패션 등 온갖 뒷이야기를 무성하게 낳던 대령 출신의 '혁명가'는 사막에서 도망치던 중 항문을 꼬치구이용 꼬챙이에 찔린 채 끔찍한 말로를 맞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집트에서는 32년 장기 집권하던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졌고, 살레의 예멘도 '아랍의 봄'에 무너진 네 번째 나라가 되었다.
역사는 어느 한순간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낸다. 2010년 튀니스에서 자신의 울분을 분신으로 표현했던 부아지지는 벤 알리, 카다피, 무바라크, 살레 등 네 명의 독재자들을 내쫓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부아지지는 목숨을 바쳐 부정하고 부패한 정권에 저항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부아지지의 비극을 만든 것은 침묵하는 다수였다.
생존을 위해 길거리에서 장사를 해야 했던 부아지지가 경찰에 얻어맞아도, 그가 과일과 채소를 부당하게 압수당해도 그의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합법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찰 권력은 오히려 약자 중의 약자에게 돈을 요구했을 뿐이다. 침묵하는 다수는 자신이 국가 권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타인이 당하는 부당한 처우는 외면했다.
최근 관심을 끌었던 넷플릭스의 드라마 'D.P.'(Deserter Pursuit·탈영병 체포조)는 군내 폭력을 실감 나게 그려내어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상관의 폭력 행위를 보복하려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석봉의 절규는 이기적인 소시민의 침묵에 손가락질을 하며 책임을 묻는다.
"나 괴롭힘당하고 죽을 것 같을 땐 가만히 있다가 저딴 새끼는 살리려고…"라는 석봉의 말에 그를 구하러 온 호열은 할 말을 찾지 못한다. 석봉은 끝내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만약 튀니스의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경찰의 폭력에 맞서서 부아지지의 편이 되어 주었다면 스물여섯 살 청년이 미이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감은 모습으로 사망하는 희생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디 부아지지가 튀니지에만 있겠는가. 대구에, 서울에, 광주에도 견디기 힘든 부정과 부패는 수많은 부아지지를 만들어낸다. 침묵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행동해야만 세상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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