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지나간 것이 주는 위로

입력 2021-09-16 10:59:20

김혜진 고산도서관 사서
김혜진 고산도서관 사서

지난 주말, 길을 지나다 우연히 '선비글방'이라는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이름만 보곤 한문을 알려주는 곳인가. 서예를 배우는 곳인가. 갸우뚱하다 문 앞에 새겨진 문구를 보고는 '아!'했다. 가게 이름과 곧장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서/비디오/DVD 대여'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비디오나 만화책을 빌려봤던 추억은 다들 있을 것이다. 옛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서였을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기웃거리다 문틈으로 가게 안을 살짝 들여다봤다. 20여 년 전처럼 여전히 누군가 빌려간 비디오 케이스는 뒤집어져 꽂혀있고 얼마나 많이 빌려갔는지 만화책의 책등은 너덜너덜했다. 사람들이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며 그 시절로 돌아가려는 '레트로' 경향은 최근 들어 더욱 확장되는 듯하다.

최근 젊은 세대에서 '할매 감성'이 인기라고 한다. 심지어 '할매니얼'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을 정도다. '할매니얼'은 할매와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의 합성어로, 주로 할머니들이 먹고 입는 음식과 패션 취향을 선호하는 세대를 일컫는다. 몇 년 전부터 유행했던 레트로, 뉴트로 열풍의 연장선으로 더해진 신조어라고 한다.

이런 문화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턴 해외에서도 '그래니 시크'(Granny Chic․세련된 할머니)나 '그랜드밀레니얼'(Grandmillennial)이라는 용어가 쓰였다. 그랜드밀레니얼은 할머니(grandmother)와 밀레니얼을 결합한 말로, 할매니얼과 유사한 용어다.

할매 감성에 빠져든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인스타그램 등의 SNS를 통해 '할밍아웃'(할머니+커밍아웃)을 하는 것이 대세다. 단팥, 인절미, 흑임자 등을 활용해 만든 간식과 할머니 옷장에 걸려있을 법한 색깔의 카디건과 꽃무늬 치마를 매치해 입는 '할미룩'을 인증해 업로드하며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과 소통한다.

연관된 단어들로 검색을 하면 4만여 개의 게시물이 검색될 정도다. 이런 할매니얼 세대의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 기업들은 식품, 패션은 물론 전자기기까지 각종 분야에서 다양한 상품들을 내놓고 있기도 하다.

한국마케팅연구원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에 수록된 '할매니얼 트렌드 전략'에서는 할매니얼 트렌드 확산 이유를 장기 불황과 코로나19로 봤다. 지친 젊은 세대의 복고를 향한 욕구가 커지고 있는데, 옛날 감성 자체가 기성세대에게는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만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젊은층에게는 '신선함'과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처럼 할매니얼은 단순한 트렌드 혹은 소비 행태로 나타나는 것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 '위로'라는 코드까지 전해주고 있다. 디지털문명 속에 살면서 느끼는 피로감과 매사 경쟁에 시달리는 각박한 현실에 더해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지금,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지금보다는 좀 더 안정되고 행복했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