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한국의 산티아고, 한티 가는 길

입력 2021-09-13 06:30:00

최민우 수성아트피아 공연기획팀장
최민우 수성아트피아 공연기획팀장

평소 야근과 주말 근무가 많아 주 52시간 근무제로 인해 평일에 휴무하는 경우가 많다. 휴무일이면 인적이 없는 시 외곽을 찾아 나선다. 몇 달 전 지인의 SNS에서 경북 왜관의 한 순례길을 알게 됐고, 언젠가 꼭 가리라 다짐했다. 9월 초 평일 휴무를 맞아 벼르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향한 곳은 북대구IC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왜관의 순례길 '한티 가는 길'이다.

'한티 가는 길'은 가실성당에서부터 한티순교성지까지 45.6km 구간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중간마다 성당이 있거나, 기도와 성인의 무덤을 참배할 수 있어 한티 가는 길과 산티아고를 합쳐 '한티아고'로 불린다.

'한티 가는 길'은 5개의 구간으로 나뉜다. 1번 돌아보는 길, 2번 비우는 길, 3번 뉘우치는 길, 4번 용서의 길, 5번 사랑의 길로 거리는 구간마다 9km 내외이다. 순례길 가기 전날 5개 구간을 종주한 지인에게 3번 구간을 추천받았다. 가장 힘들기로 소문 난 구간이기에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왜관으로 향하는 중 순례길 스탬프 책자가 1번 구간 출발지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중간 지점마다 도장을 채워가며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1번 구간 출발지로 방향을 돌렸다. 1번 구간은 가실성당에서 신나무골성지까지 10.5km, 순례길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스스로 삶을 되돌아보고 생각하는 '돌아보는 길'이다.

'한티 가는 길'은 곳곳에 설치된 이정표와 나무에 걸린 파란, 빨간 띠를 따라 걷는다. 모르는 길을 찾을 때 당연히 스마트폰을 꺼내지만, 순례길에서는 필요가 없다. 귀뚜라미 소리를 벗삼아 걷다 보니 임시도로와 숲길 갈림길이 나온다. 연일 내린 비 때문에 젖어있을 숲길 대신 임시도로를 택한다. 얼마 남짓 걸었을까, 전망대로 오르는 산행이 시작됐다. 전망대까지 향하는 30여 분간 눈앞에 보이는 오르막이 마지막이길 바라지만 모퉁이를 돌면 늘 새로운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1번 구간의 70% 이상은 산행이었고 중간 지점부터 임시도로가 끝나 비에 젖은 산길을 걸어야 했다. 1년 만에 꺼내 신은 등산화도 밑창이 덜렁거리며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힘들 때마다 집에서 가져온 시원한 매실차로 목을 적셨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산행을 이어갔다.

출발 2시간여 만에 기다리던 평지가 나왔고, 연꽃잎 가득한 도암지에서 네 번째 도장을 찍었다. 도암지 정자에서 점심을 먹던 순례길 여행객 2명이 함께 밥을 먹자며 말을 건넸다. 점심 약속이 있어 함께할 수 없었지만, 같은 길을 걷는 여행객이 전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종착지까지 걸을 수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면 '왜 사서 고생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오르막길에서는 내리막길을 찾고, 내리막길에서는 평지를 찾았다. '한티 가는 길' 1번 구간에서 육체적 힘듦에 걸어온 길을 뒤돌아볼 여유는 없었지만 최근 사회에서 비친 나의 모습, 10.5km 구간을 걸으며 힘들다고 불평하던 나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