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링 칭링 메이링 / 장융 지음 / 이옥지 옮김 / 까치 펴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소설과 영화에서 부동의 명저와 명작이 된 건 전쟁이라는 삶의 최대 격동기에서도 피어난 사랑과 우정, 증오와 배신, 권력욕과 같은 인간의 밑바닥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소설의 무대가 서양이라면 동양, 그 중에서도 중국 근현대기에 태어난 쑹(宋) 씨 세 자매의 파란만장한 삶도 두 소설이 보여준 스케일과 삶의 질곡에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전자가 격변기에 '있을법한' 삶을 바탕으로 한 픽션의 성격이 짙다면, '아이링 칭링 메이링'은 철저한 자료고증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다큐멘터리 성격이 강하다. 마치 잘 짜인 역사 드라마처럼 말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중국은 군주제의 몰락과 공화정의 출현, 그리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겪으면서 역사의 소용돌이 속을 헤맨다. 이 격동의 시기에 중국 권력의 심장에는 쑹(宋) 씨 3자매가 있었다. 바로 아이링(譪齡·1889년 출생), 칭링(慶齡·1893년 출생), 메이링(美齡·1898년 출생)이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아버지 쑹자슈(宋嘉樹)는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남감리교로 개종한 사람이었고, 세 자매는 어린 시절 교육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보내져 중국어보다 영어에 더 능통했다.
특히 이들을 현대 중국의 '공주'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비범한 결혼상대들이었다. 맏언니 아이링은 온화한 성격의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했고 쿵샹시는 아내의 인맥 덕분에 오랜 기간 동안 중화민국 국무총리와 재정부 장관직을 독차지했으며, 아이링은 남편의 지위를 이용해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가운데 한 명이 됐다.
둘째 칭링은 1911년 청조를 몰아내고 공화정을 수립한 신해혁명의 선구자 쑨원(孫文)과 결혼했다. '마담 쑨원'으로 불린 칭링은 이후 공산당에 가입해 '붉은 자매'라는 별명을 얻으면서 격동의 중국에서 다른 형제자매와 차별화된 정치 노선을 택했다. 1949년 공산 중국이 수립되자 칭링은 마오쩌둥을 보좌하는 부주석이 됐다. 중국에 공화정이 도입될 당시 아이링과 칭링은 둘 다 쑨원의 비서로 일했고, 쑨원은 맏언니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퇴짜를 맞고 이어 둘째 칭링에게 접근해 결혼했다.

중국 근현대에서 처음으로 공화주의를 주창한 쑨원과 칭링의 결혼생활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자.
'1918년 5월 광저우를 떠난 두 사람은 상하이에 머물게 됐다. 이즈음 쑨원을 본 사람은 그의 쪼그라든 모습에 충격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51세의 쑨원은 머리가 하얗게 셌고, 숱이 눈에 띄게 줄었다. 어깨는 볼품없이 축 처졌으며 표정에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눈 한쪽이 곪아서 심하게 부풀어 오른 탓에 핼쑥한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 마음 속 깊이 응어리진 한이 그를 괴롭혔다.'
점점 권력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쑨원의 말로에 비해 결혼 후 칭링은 전보다 더 아름다워졌다. 이를 두고 칭링의 아버지의 후원자였던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담배 업계의 큰손 줄리언 카는 이때 상하이를 방문했다가 그녀를 보고 자신이 중국에서 본 여성들 중 "가장 잘 생긴 아가씨'라고 평했다. 그녀의 상냥한 웃음, 세련된 말솜씨는 여러 사람들의 기억에 아주 오래 남는 추억이 됐다.

막내 메이링은 국민 정부를 이끈 장제스(蔣介石)와 결혼, 22년 동안 타이완의 퍼스트레이디로 있었다.
장제스와 메이링의 중매는 맏언니 아이링이 나섰다. 스스로 명성이 부족하다고 느낀 장제스는 아이링의 저녁초대를 받고 흥분했다. 당시 장제스는 유부남이었다.
메이링은 뛰어난 지적 능력을 타고났지만 두 언니들과 달리 처음엔 정치적 견해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녀가 변한 건 1927년 광저우에서 본 '적화'(赤化)도시의 실상을 본 이후였고 다시 상하이로 온 후 맏언니의 격려에 힘입어 장제스와 인생을 함께할 마음을 굳혔다. 이런 인연으로 이후부터 아이링은 장제스에게 누구보다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이런 일련의 인생역정을 빗대어 세 자매의 삶을 흔히 "한 명은 돈을 사랑했고, 다른 한 명은 권력을 사랑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은 국가를 사랑했다"는 말로 요약되기도 한다.
책은 격동의 대륙 중국에서의 세 자매의 성장 배경과 이들이 사랑한 남자들과의 이야기, 20세기 중국의 정치적 변화상을 대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듯 펼쳐놓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 자매의 삶이 얽히고설키는 과정을 중국의 근현대사와 엮어 풀어놓으면서 역사의 중요한 국면마다 그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쑨원의 일례처럼 개인숭배와 신격화의 껍데기를 벗기고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중국 근현대 지도자들의 인간적인 이면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488쪽, 2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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