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북한 정권의 최초 형태는 남한보다 앞서

입력 2021-09-09 11:24:25 수정 2021-09-09 18:44:04

김병욱 북한학 박사(동국대 북한학연구소 연구원)

김병욱 북한학 박사(동국대 북한학연구소 연구원)
김병욱 북한학 박사(동국대 북한학연구소 연구원)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북한이 정부 수립을 남한보다 25일 늦게 잡은 속셈은 따로 있었는데 분단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남한이 먼저 정부를 수립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남한이 먼저 단독정부를 세웠기 때문에 북한은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즉 단독정부 수립에 따른 분단 책임을 이승만과 남한 정부에 뒤집어씌우기 위한 반박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사실 단독정부를 누가 먼저 수립했는지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처음 열렸는데 주된 과제는 한국 내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김일성은 이미 스탈린으로부터 북한 단독정부 지령을 하달받고 1946년 2월 8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구성되기도 전에 서둘러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북한 정권의 최초 형태를 만들고 위원장이 되었다. 1945년 11월까지 전국 각 도·시·군·읍·면 단위의 인민위원회가 대부분 결성되면서 행정권을 넘겨받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인민위원회의 권력 장악을 도우며 사실상 북조선 정권기관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서 중앙행정 주권기관으로서 북한 전역을 포괄하는 중앙기구 역할을 했고, 북조선의 인민 사회단체 국가기관이 실행할 임시 법령을 제정하고 공표할 권한을 갖는 것으로 규정했다. 이는 바로 정부를 뜻하는 것으로 김일성이 실질적으로 북한 지역을 통치하는 지도자 역할을 했다.

한편 김일성은 정부 수립에 앞서 인민군을 먼저 창설했는데 이미 1946년 2월 군사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평양학원을 개원했으며 동년 7월에는 군사 정보와 전문적인 보안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보안간부학교를 개교했다. 김일성은 평양학원이나 보안간부학교라는 명칭을 사용, 군대라는 인상을 숨기기 위해 표면적으로 위장했다. 군을 창설한다는 것은 국가 수립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에 남한의 정부 수립보다 빠른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먼저 창설한 것을 비춰 봐도 다분히 국가 수립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판단된다.

남북한 총선거가 유엔에서 결정됐지만 소련과 북한이 반대, 남한만 선거를 치르게 됐다. 남한 내에서도 단독정부 추진 세력과 반대운동 세력이 맞서는 정치 구도가 형성되었으나 미군정은 5·10 선거를 강행하였다.

김일성은 정부 수립의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남한에서 실시한 5·10 선거를 부정하는 한편 남한에서도 단독정부 추진을 반대했던 김구와 김규식은 정치 협상을 통해 분단을 막기 위해 제안된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길에 올랐다. 그럼에도 5·10 선거가 강행되자 다시 북한은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2차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를 열어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을 이룩하자는 난상 토론을 제의했다. 하지만 이미 남북한 선거를 치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빌미로 김일성은 남한의 일부 정치세력과 연결하여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최고인민회의를 만들고자 북한에서 8월 25일 212명의 대의원을 직접 선출했고 남한에서는 비밀리에 지하 선거를 통해 360명의 대의원을 뽑아 1948년 9월 8일 헌법을 채택했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9월 9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