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경산과 3성현', 어떻게 볼 것인가

입력 2021-10-05 10:35:03 수정 2021-10-06 15:21:10

박순교 경북대 인문학술원 객원 연구원

박순교 경북대 인문학술원 객원 연구원
박순교 경북대 인문학술원 객원 연구원

한국의 각 지방자치단체가 특색을 살려 문화관광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경북 경산(압량) 역시 역사와 문화에 비중을 두고, '삼성현'(三聖賢)을 현양해왔다. 3성현은 원효, 설총, 일연을 일컫는 조합이다. 3성현 문화박물관, 3성현 초·중학교, 3성현을 칭한 도로망 등 경산 전역에 드리워진 3성현의 그림자가 진하다.

3성현 중 원효는 김춘추의 사위, 설총은 김춘추의 외손자에 해당한다. 필자는 김춘추의 궤적을 오래 추적했다. 이에 3성현과 압량의 함의에 각별한 흥미를 지녔고, 관련 내용을 구명했다.

압량에 있는 홍유후(설총의 추증 시호) 신도비(금석문)들은 사실과 어그러짐이 크다. 죽은 자의 영혼이 지나는 길목(신도)에 세우는 비석이 신도비이니, 설총의 무덤이 없는 압량의 신도비는 이름에서부터 어긋난다.

그 문면(文面) 또한 신라의 사정과 부합되지 아니한다. 문헌 자료(읍지 등을 포함) 역시 전거(典據) 자료의 불명과 모순 등 여러 잣대에 견줘 설총의 압량 출생은 사실성이 없다. 문헌 기록과 금석문과의 괴리, 여러 지리지 기록 등을 종합할 때 설총은 출생, 성장, 활동, 사망 등 전 영역에서 압량과 무관하다. 이는 조선 말 압량의 사족에 의해 설총의 유천 출생이 처음 피력되기 시작하였다가, 국망 이후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더욱 깊은 유곡 골짜기에 신도비를 건립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곡 출생이 정착한 결과였다.

반추해 본다면, 설총을 향한 추숭의 열정이 애초 거짓을 낳았고(초개사 신도비), 그 거짓이 주작(做作)을 낳았으며(도동재 신도비와 설총의 가묘), 주작이 다시 규모를 키워 허상(3성현 스토리텔링)을 낳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설총과 압량이 무관한 만큼 3성현 담론은 즉각 폐기되어야 한다.

압량은 삼국통일의 서막을 연 김춘추와 깊은 관계가 있다. 642년 고구려에 구금당해 있던 김춘추를 생환하게 한 세력도, 김춘추 집권에 결정적 전기를 맞이한 비담 난을 뭉개는 정난(靖難)의 주축도 압량이었다.

백제 옥중에 묻혀 있던 고타소(김춘추의 맏딸)의 해골을 6년 만에 되찾게 한 세력도, 김춘추가 적대세력을 무력화시키고 즉위하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세력도 압량이었다. 김춘추 일가 3대(김춘추, 김인문, 신문왕)에 걸쳐 압량은 핵심 요지로 줄곧 거론된다. 압량은 김춘추의 집권 전단을 열었으며, 중대 통일 정권을 추동한 정치적 교두보였다. 김춘추의 칼날은 압량에서 버려졌다. 김춘추는 압량의 힘을 토대로 서라벌 기존 세력을 재편하며, 밖으로는 통일의 물길을 열었다.

압량은 혁신과 통일의 거점, 신라 중대 왕실의 배태지라는 역사성을 함의한다. 반도의 한 모퉁이에 처한 작은 나라 신라가 마침내 백제, 고구려, 일본, 당나라와의 국제전에서 모두 승리해 최종 승자로 올라선, 울림 있는 서사의 시작과 종착은 압량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분단된 국토의 통일이 시대적 과제로 남겨진 지금, 압량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긴요하다. 도시 디자인의 새로운 수정이 요망된다.

박순교 경북대 인문학술원 객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