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한 점 우연히 발견
최북(崔北)!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아득한 대학시절이었다. 남공철이 쓴 '최칠칠전(崔七七傳)'을 통해서였다. 이 글의 들머리는 이러했다. "최북의 자는 칠칠(七七)인데 세상 사람들은 그의 출신을 몰랐다. 이름을 둘로 나누어 자(字)로 삼아 행세했다. 그림을 잘 그렸지만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아 항상 한쪽에만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 술을 즐겼으며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들어가서 매우 즐거워하며 술을 많이 마시고 웃다가 울다가 하더니, '천하 명인 최북이 천하 명산에서 죽는다'라고 부르짖고는 곧 몸을 날려 구룡연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기인이었다. 중인(中人) 출신으로, 북(北) 자를 파자하여 '칠칠(七七)'로 자를 삼았고, 외눈이었기 때문에 안경은 한쪽만 착용했다. 조희룡의 '최북전(崔北傳)'에는 그의 외눈에 관한 사연도 전한다. 한 지체 높은 사람이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하며 위협하자, '남이 나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라고 하면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멀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대의 사람들은 그를 '조선의 고흐'라 부르며, 자신의 귀를 잘랐던 네덜란드의 화가 반 고흐(Van Gogh)에 비기기도 했다.
최북은 그림으로 이름이 났지만, 이 때문에 그의 삶은 오히려 치욕적이었다. 1748년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기도 하였는데,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림을 구하였다. 그림의 바탕이 되는 흰 비단이 궤짝에 수북 쌓였으나 그는 붓을 들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림에 대한 심각한 염증을 느낀 것이다. 자신의 눈을 찔러 멀게 하였다는 것도 이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49세에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자가 '칠칠'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가 최북을 다시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이었다. 경북대 중앙도서관 4층 자연과학자료실에 들렀다가,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호생관(毫生館)이라 쓰고 최북(崔北)이라 낙관한 그림이었다.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호생관은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삼기재(三奇齋), 거기재(居其齋) 등과 더불어 최북이 즐겨 사용했던 별호다. 화제는 따로 없었다. 물속에 세운 정자에서 사람들이 모여 흥취를 즐기고 있으니, 수각일흥도(水閣逸興圖)라 할만하다.
그림은 허실과 동정을 갖추고 있었다. 왼쪽과 위쪽은 비어있고, 오른쪽과 아래쪽은 채워져 있다. 빈 것은 채운 것으로 인해 자유롭고, 채운 것은 빈 것으로 인해 튼실하다. 굵은 기둥에 의지한 수각의 정태성과 농묵으로 그린 나뭇잎의 동태성은 서로 대립되어 있다. 이러한 구도 하에 사람들은 수각에서 일흥(逸興)을 즐기고, 정자 아래로는 호수 위에 연잎이 몇 개 떠 있다. 특히 정자 위쪽에 있는 산은 단순하면서 화려한 흥취로 흩날린다.
조선후기의 문신 신광하는 최북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붓으로 먹고사는 환쟁이라 하였지.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하나밖에 없었는데, 술 석 잔만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라 하였다.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던 낮은 신분의 예술가 최북! 어쩌면 그의 일탈은 당대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미의 투사(鬪士)가 벌인 광기의 예술성도 함께 읽힌다. 그의 빛나는 외눈이 내 마음속에서 다시 전율을 일으키는 이유이다.
정우락 경북대 교수‧도서관장

※다음주부터는 [대학 도서관을 가다-영남대] 편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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