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막 청소를 하고 싶어졌다. 원고 마감일을 기억하는 '나', 글 쓰는 것 빼고 다 하려는 '나',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나'는 최소 셋으로 분열된 채 키보드 앞을 서성였다. 처음 신문 연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외장하드를 뒤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에는 그래도 글을 쓰고자 하는 의욕이 있었고 신춘문예 응모 주소 같은 것도 모아두는 인간 유형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를 소환하면 금방이라도 글을 쓸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낯선 것은 역시 과거의 나였다.
스스로를 다잡을 목표가 필요했기에 매주 쓰는 이 글을 누가 좋아할지 그려보았다. 당장 우리 언니가 떠올랐다.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으흐흐 웃는 순간이 책방 블로그에 올라온 내 글을 볼 때라고 했으니, 언니는 아마도 신문을 매주 챙겨보는 독자가 될 것이다. 그래, 언니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쓸 수 있지.
부모 세대의 잘못일 테지만, 아니 이제 와 새삼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지만 언니와 나는 따로 자랐다. 어쩌다 언니와 만나는 날이면 반월당 동아쇼핑에서 돈가스를 먹었고 나는 평소보다 말이 많아졌다. 어른들 앞에서 유독 대답이 간결하고 얼굴이 발개지던 언니는 나랑 단둘이 있을 때 훨씬 다정했다.
심지어 공부까지 잘하던 언니는 여섯 살 어린 나에게 개천절, 제헌절 같은 국경일을 가르쳐주었고 그중에서도 삼일절이라는 말은 날짜를 따서 지었으니 기억하기 쉽다고 반복 학습해주었다. 지금껏 해마다 3월 1일이면 자연스레 언니를 떠올린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도 말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언니를 만나던 날이야말로 나에게는 진정 국경일이었음을 고백한 적도 없다.
언니와 헤어진 다음 날이면 나는 괜히 반 아이들에게 언니 자랑을 했다. 한 친구는 대뜸 "너, 언니 없잖아, 한 번도 못 봤는데?"라고 말해서 나 또한 갑자기 언니가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혼란이 심하던 어느 해에는 자기 소개란에 '외동'이라 써버린 적도 있다.
그런데도 언니를 생각나게 하는 것들은 곳곳에 있었다. 특히 언니가 사준 '달과 6펜스'는 나의 첫 애장품이 되었고, 너무 어릴 적부터 몇 번이나 읽어온 탓에 고갱과 고흐가 어쩐지 우리 친척 아재들같이 여겨졌다. 지금은 거꾸로 내가 언니에게 책을 추천해주지만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언니가 권한 책들은 나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언니와 떨어져 살아서 좋은 점도 있었을까. 언니라는 빈자리에 나는 뭇사람들을 앉히고 보내기를 반복하였을 것이다. 다른 평범한 집 자매처럼 친해지지 못한 것이 서럽지만 그 설움의 자국조차 스스로 청소해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어쩌면 이 글은 독자인 언니에게 보내는 줄기찬 편지가 될 것이며 세상의 모든 언니들에게 전하는 씩씩한 안부가 될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도처에 숨어있는 정의롭고 글 잘 쓰는 언니들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으며 그들과의 연대가 글로도 가능할 것임을 지금, 이 순간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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