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 추사는 벗인 초의선사에게 대웅전에 걸린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떼라고 했다. 9년이 흐른 뒤 귀양살이를 끝내고 다시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원교의 현판을 찾아 다시 걸도록 했다. 방약무인했던 추사의 인격이 제주도 유배를 거치며 성숙해진 결과다.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추사는 혹독한 유배 생활을 했다.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둘러싼 집 안에서만 지내야 하는 위리안치는 엄중한 형벌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제주도 유배는 추사에게 많은 것을 '선물'했다. 제주도 위리안치가 없었다면 '세한도'(歲寒圖)도, 추사체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추사의 인격도 고양되지 않았을 것이다.
회고록 '조국의 시간'을 내놓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자신을 '위리안치된 극수(棘囚)'라고 지칭했다. 극수는 가시덩굴 안에 갇힌 죄인을 뜻한다. 위리안치된 죄인이라는 조 전 장관의 표현부터 잘못됐다.
위리안치된 사람이 책을 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조선시대라면 사약(賜藥)을 받고도 남는다. 지금껏 SNS를 통해 온갖 사안에 대해 입을 댄 조 전 장관의 행태 역시 극수와 거리가 멀다. 정말 조 전 장관이 위리안치된 죄인과 같은 심정이라면 반성하며 조용히 지내는 게 맞다. 굳이 책을 낸다면 책 제목은 '조국의 시간'이 아니라 '조국, 참회의 시간'이 걸맞다.
조 전 장관은 기소됐을 때 "법정에서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했다. 하지만 형사소송법 제148조를 들어 증언을 거부했다. 증거와 법리로 다투는 법정 증언은 거부하면서 일방적 주장을 담은 회고록을 내놓았다. 그는 "정치활동을 하거나, 현재 정치과정에 개입하기 위함이 아니다"라고 출간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2년 전 '조국 사태'에 대한 소회를 밝히며 검찰과 언론에 불만을 쏟아내고, 자신의 처지를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동일시하고, 친문 진영의 위기감을 증폭하는 책 내용을 보면 조 전 장관의 출간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여당의 대선 주자들은 앞다퉈 조 전 장관을 두둔하고 나섰고, 친문은 다시 결집하는 모양새다. 참회 없는 '조국의 시간'에서 조 전 장관이 쓴 책 '진보 집권 플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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