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아직도 하버드 연필을 가지고 있다

입력 2021-05-31 06:30:00

이나리 소설가
이나리 소설가

나는 기억하는 일이 유난히 어렵다.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쉽게 연결하지 못하고, 그 사람과 나누었던 경험이나 이야기를 쉽게 잊는다. 방향 감각도 없고 지난 적이 있는 길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특히 길 찾기는 내게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건물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애써 유지한 방향 감각이 몽땅 사라진다. 그뿐인가. 같은 길도 낮과 밤이 각각 다르게 보인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글쓰기에만 재능이 몰려있구나?"

글을 쓰는 일에는 차곡차곡 정리해둔 기억의 서랍이 필요하다. 나도 그런 서랍이 있다. 문제는 '차곡차곡'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기억은 일단 서랍에 넣고 본다. 보관 태그를 걸어놓고 서랍을 닫지만 분류가 되어 있지 않은 탓에 서랍 안은 항상 어수선하다. 이 때문에 저장된 기억을 빨리 떠올리지 못해 기억력이 무딘 사람처럼 보인다.

20대 초반의 대학생 시절, 나는 정말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분식집, 카페, 편의점, 놀이공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종을 거쳤다. 그때 내가 일했던 카페는 교동시장 근처 2층에 있었는데, 테이블이 다섯 개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곳이었다. (지금의 프랜차이즈 카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실내 흡연도 가능했다)

어느 날 금발의 외국인 남자가 찾아왔다. 남자는 영어로 내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도 언어는 몸짓과 눈치로 어느 정도 통하기 마련이다. 나는 커피를 주문받았다. 남자는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는 동작을 했다. 영어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옆에 앉길 바랐다. 아마도 그 남자의 머릿속에는 다방 레지의 이미지가 있는 듯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노" 를 수차례 외쳤다.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예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노" 밖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남자는 내 말을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커피를 단번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왔다.

그는 내게 연필을 꺼내 보여주었다. 하,버,드 하고 또박또박 발음하며 그 연필의 몸통에 적힌 HARVARD UNIVERSITY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곤 내게 그 연필을 건네주었다. "미?"(이것을 내게 주는 건가요?) 라는 내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색하게 "땡큐"라고 말하며 연필을 받아들었다.

나는 아르바이트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 남에게 들려주는 걸 즐겼다. 하지만 이 이야기만큼은 어디에서도 말한 적이 없다. 이 이야기는 항상 내게 수치감을 주었다. 무엇이 수치스러운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다.

내 기억의 서랍에는 쓸 수 있는 이야기와 쓸 수 없는 이야기가 혼재되어 있다. 무딘 기억력의 내가 이 이야기를 떠올린 건, 이제 쓸 시기가 되었다는 모종의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는 아직도 그 연필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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