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기본이 혁신이다

입력 2021-05-24 11:23:03

이수영 책방
이수영 책방 '하고' 대표

어느 날 길을 잘못 들어서 낯선 공단지역을 지나게 되었다. 경로를 재탐색 중이라는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을 들으며 온통 회색으로 덮인 공장 앞을 지나다가 커다란 글씨가 슬로우모션처럼 눈앞을 스쳤다. 공장 입구에 적힌 문장, 'BASIC IS INNOVATION(기본이 혁신이다)'. 그 공장의 사훈이나 표어로 보이는 문장을 마치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라도 된 양 혼자 몇 번이나 되뇌어 보았다.

이 문장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을 받았고 그 후로 오랫동안 그 말을 생각했다. 기본이 혁신이라고? 물론 저 말이 의미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모르지 않지만 더 확실히 알아보고 싶어 국어사전을 찾았다.

사전에 '기본'은 '사물이나 현상, 이론, 시설 따위의 기초와 근본', 혁신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란 뜻으로 나온다. 의미상으로만 보자면 이 두 단어는 반대에 가까운 말이다. 기본이라 함은 변함없음을, 혁신이란 극단적 변화를 포함하니 말이다.

결국 내가 느낀 묘함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 두 단어가 'A=B이다'로 표현되니 그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모순이라고 느낀 것이었다. '사랑은 미움이다'처럼. 처음에는 아름답고 완전무결하고 영원할 것 같은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때로는 미움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기도 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듯이, 기본을 한결같이 지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변화,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기도 한다. 즉 혁신은 기본을 먹이로 하고 기본은 자라서 혁신이 되기에 둘은 뗄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개념들은 여러 책에서 각기 다른 버전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저널리스트인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서 누구나 어떤 영역에서 1만 시간을 단련하면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가 말한 1만 시간 역시 기본이 혁신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다.

일본에서 70년 넘게 사랑 받고 있는 생활잡지인 '생활의 수첩'의 편집장이었던 마쓰우라 야타로도 '일의 기본 생활의 기본 100'이란 책에서 "기본은 반복하면 연마됩니다. 기본은 언제나 나를 돕습니다"라며 기본을 강조했다.

훨씬 더 고전으로 가면 공자의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에도 이런 개념이 나온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이 바로 서면 도가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즉, 기초가 제대로 서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본은 자주 강조되었다.

이쯤에서 자아비판의 시간을 가져본다. 과연 나는 기본에 충실했는가. 지금과 다른 모습, 변화를 꿈꾸며 기본을 등한시하지는 않았는가. 이 질문이 좀 불편한 걸 보면 아직 갈 길이 멀었나 보다. 내가 원하거나 부러워하는 모습들은 많지만 그 이면에 감내해야 할 묵묵한 시간은 가능한 짧거나 아예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망상과 허영은 늘 나와 가까이 있다. 오지 않은 미래에 끌려가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지킬 수 있는 기본에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작심을 해본다. 변화는 변함없는 것들이 모여 만든다는 인생의 진리를, 때론 잘못 들어선 길 위에서 회색 공장이 가르쳐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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