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서예와 수행

입력 2021-04-28 06:30:00

칠곡 동명 정암사 주지

글을 쓸 때 펜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붓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내용을 위주로 쓰는 시와 수필, 소설 등등은 내용에 따라 감동을 준다면 글씨의 변화와 통일, 속도, 압력으로 인해 신비로우면서 고아한 운치를 나타내는 것은 붓글씨다.

그러나 서예는 글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수행과도 같은 것이다. 점과 획을 모아 글자를 만들고, 글자가 모여 문장을 만들며, 문장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은 모든 법칙과 혼신을 다해야 이루어 질 수 가 있다. 수행자도 하나하나의 작은 행동과 말, 그리고 마음 씀씀이를 고치고 닦아서 지혜를 이루어 타인을 교화하고 봉사하는 것이 수행자의 완숙함이 되는 것이다. 서예를 한다는 것은 멀고도 긴 수행길이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붓을 얼마나 강하게 혹은 약하게 운필하느냐, 그리고 붓을 얼마나 빠르게 혹은 느리게 운필하느냐에 따라 율동미가 만들어지고 필자의 기호나 마음의 움직임까지 표현된다. 수행자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여러 수행 중에 급하다고 너무 빨리하려고 해도 안 되고 너무 시간이 많다고 느리게 해서도 안 되며, 마치 거문고의 줄과 같아서 너무 팽팽하면 줄이 터져버리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적당한 중도를 취하고 꾸준히 인내하면서 열심히 해야 할 때는 열심히, 적적요요하게 정진해야 할 때는 끝없이 삼매에 들어야하는 것이 수행과 붓글씨는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내 마음이 가고자 하는 대로 글씨가 쓰여진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연습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짧은 시간을 가지고서는 붓은 절대 내 마음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 오랜 반복과 연습을 통해야 만이 자유자재로 붓을 움직일 수 있다. 마음의 움직임도 또한 나쁜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마음이 시킨 대로 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수행을 통해 업장을 소멸하는 것도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선생님들께서 붓으로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멋있고 존경스럽게 보여서 많은 분들이 붓글씨를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시작해 보면 만만치가 않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마음먹었던 대로 글씨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시간, 건강, 여러 가지 핑계로 중도에 하차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급하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어느 예술에도 마찬가지지만 서예는 관심과 몰입, 인내를 요하는 예술이다.

서예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아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매일매일 수행 정진하는 자리가 죽 떠먹는 자리라고 비유한다. 그것은 죽은 먹어도 밥그릇에서 줄어드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꾸준히 열심히 먹으면 죽은 없어진다. 그래서 빨리 이루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발전하는 것이 보이지 않아서 지루하기만 하다는 뜻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붓 몇 번만 잡으면 멋있는 글이 나올 줄 알았는데 초보자에게는 멀고먼 길이 아닐 수 없다. 인내하지 못하여 떠나는 것이 비일 비재하다.

어떤 스승께서는 "글씨를 쓴다는 것은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고 하시고, 혜정 선생님께서는 "글씨의 실력이 커지는 것은 돌이 크는 것과 같다. 돌이 클 때까지 나와 붓이 하나가 되었을 때 삶의 고뇌는 환희심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고 한다. '글씨의 실력이 돌이 크는 것과 같다'라는 것은 마음이 앞서가지 말라는 경책이 아닐까 싶다. '돌이 커진다'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듯이 성취하려고 애쓰지도 말고, 명예를 바라보지도 말며, 이익을 생각하지도 말고, 마음을 비우고 무심으로 써 내려 가다보면 어느 순간에 붓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뛰어난 작품이 나오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서예를 하는 것, 역시 수행의 길이나 다름이 없다.

칠곡 동명 정암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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