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박성우 씨 외조부 故 신원식 씨

입력 2021-04-18 14:19:19 수정 2021-04-18 18:08:01

외손자 대학 입학 때·군 제대 후에도 용돈 두둑히 챙겨주셨지요
병원에 계시는 동안 자주 인사드리러 가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

어릴 적 외갓집 가는 길은 항상 설렘이 있었다. 나를 유독 귀여워 해주신 외할머니가 좋기도 하였고, 외갓집에는 늘 사람이 북적거렸다. 외사촌 동생들과 함께 탐방하던 논두렁의 흙냄새, 개울의 물소리 같은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서적 오감도 좋았다.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커가면서 외갓집의 여러 풍경과 분위기는 바뀌었지만, 외할아버지는 변함이 없으셨다. 항상 단정한 옷매무새와 깔끔하게 빗은 머리는 세월이 지나서도 그대로였다.

대학을 입학하던 그 날 외할아버지께서 주신 용돈으로 좋은 옷들과 책들을 샀고, 제대한 뒤에도 외할아버지는 용돈을 두둑이 챙겨주시어 제가 기죽지 않게 복학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셨다. 회계사시험 준비, 취업 준비 시절 성공해서 외갓집을 새로 지어 드리고 싶었다. 이따금 찾아뵐 때면 어른들께 그렇게 해드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내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어려운 현실과 싸우는 사이 외할아버지는 늙으셨고 지병이 생기셨다.

병원에 장기간 입원해서 계시는 동안 먹고 살길 찾는다는 핑계로 병문안을 몇 번 가보지 않은 것이 천추의 한이다. 외갓집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자란 내가 외할아버지께 자주 인사드리러 가지 못한 것이 너무 죄스러웠다.

그렇게 외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장기간 치료하시다 영천시 신녕면 소재 한 요양병원에 입소하셨고, 그 뒤는 더욱 발 길이 뜸해졌다. 당시엔 어느 하나 자리 잡지 못한 내 모습 때문에 외할아버지를 찾아뵙는 것이 부끄러웠다. 뭐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거짓말을 해야 할 것만 같고, 사실대로 말씀드린다 한 들 외할아버지의 걱정거리가 되기 싫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데, 찾아뵙고 손 부여잡고 따뜻한 말씀 듣고 얼굴이나 보고 왔으면 하는 후회만 남는다.

다행히도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부모님과 급히 가서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시간 많은 백수라서 외할아버지의 모든 장례 절차에 함께할 수 있어 그건 아쉽지 않았다.

못난 외손자는 중요한 일을 앞두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는 이따금 호국원을 찾아가서 외할아버지께 부탁한다. "할아버지 저 좀 도와주세요"라고 염치없는 부탁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지만 나는 떠나간 외할아버지가 너무나 그립다.

어머니와 이모, 삼촌에게는 호랑이 같았다지만, 내겐 너무나 따뜻한 외할아버지로 기억에 남는다. 외할머니처럼 손 꼭 부여잡고 살갑게 말씀해 주시진 않았지만, 늘 따뜻한 어투로 바르게 살고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하시던 외할아버지의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외할아버지, 저는 이제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아서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가정을 이루어 간다고 찾아가서 자랑하고 싶은데 너무나 답답한 마음이 많이 남습니다.

외할아버지 계신 호국원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자주 못 가는 것이 또 죄송하네요. 아직 혼자 계신 외할머니는 제가 잘 보살펴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좋은 곳에서 편히 계시길 바랍니다. 외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후회를 많이 한 것처럼 앞으로 후회하지 않도록 늘 최선을 다해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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