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작업이 가능한 일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집에서 작업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프리랜서 재택근무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일정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근무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다만, 평소 누워서 방송 프로그램 몰아보기를 취미로 여길 만큼 집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전에 비해 게을러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돼 애써 노트북을 싸들고 집 앞 카페로 발걸음을 옮긴다.
학창 시절에 하루 공부 양을 체계적으로 계획하는 스터디플래너가 유행했었다. 학교 앞 문방구에 다양한 디자인의 노트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대부분 계획의 달성도에 따라 동그라미, 세모, 엑스 표시를 할 수 있는 빈칸이 만들어져 있었다. 당시에는 그 조그만 빈칸들이 내 성실함의 무게인 양 무겁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계획한 시간을 넘겨 공부하기도 하고, 세모를 동그라미로 만들기 위해 슬그머니 계획을 고치기도 했다.
우연히 하루 계획을 15분 단위로 짜는 친구를 본 적 있었다. 그 친구에게 "왜 그렇게 잠깐의 휴식도 없이 계획을 짜는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여유롭게 계획을 짜면 자신도 모르게 게을러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스스로 정한 시간 안에 일정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조용히 엑스를 그려 넣던 그 친구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요즘의 우리는 무의식중에 바쁜 삶을 강요당하며 사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뒤처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손에 일이 없으면 불안해하거나 죄의식을 느끼는 일 중독 상태를 겪기도 한다.
이렇게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뜻하는 '번아웃 증후군'이 있다.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자주 볼 수 있어 현대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 구직 사이트에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번아웃 증후군 경험 여부'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더니 20대의 65%, 30대의 75%가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다른 연령대에 비해 비율이 높은 축에 속했다. 삶의 토대를 다지는 시기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압박감을 많이 느껴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서점에 들렀다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작가는 때론 쓸데없는 생각과 일상 속 소소한 행동들이 생각지도 못한 위로와 즐거움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 말라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공감의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당연한 말들에 공감과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씁쓸하기도 하다. 바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 하루 만이라도 게으르리만치 여유 있는 저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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