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볼수록 빠져드는 걸어서 헬싱키 속으로
핀란드 라플란드지역의 겨울은 혹독한 추위로 눈과 얼음이 북극을 향하는 쉐빙선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리셀카에서 기다리다 핀란드 최북단 비행장 이발로(Ivalo)로 향했다.
흡사 시골의 버스 정류장 같은 비행장은 눈 속에 묻혀서 차가운 바람에 비행기가 흔들리는 듯하다. 불과 1시간 40여분 만에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의 반타(Vanta)공항에 도착했다. 잠시 여유를 가지고 스웨덴으로 돌아서 혹한의 겨울날씨가 풀리기를 기다리며 다시 북극을 향하기까지의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헬싱키는 핀란드 남쪽에 위치하며 발트해를 품고 있는 항구도시다. 인구 130만의 크지 않은 도시에 박물관·미술관·교회 등 주요 관광지가 오밀조밀 붙어 있어 걸어서 유유자적 여행하기 좋다. 사전 계획하지 않은 덕분에 숙소는 헬싱키 중심가와 적당히 가까우면서도 주거지역이라 배낭족인 내가 머물기엔 최상이었다. 배낭을 풀고 나선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은 여행자의 흥미를 한층 자극한다.

헬싱키의 랜드마크인 대성당을 먼저 찾았다. 유럽에서 가장 넓은 광장중의 하나인 원로원 광장은 알렉산드로 2세 동상을 중심으로 헬싱키 대성당과 정부청사 등이 광장을 둘러싸고, 19세기에 지어진 주변건물들이 멋스럽다. 북쪽 계단 위에는 백색 외관에 초록색 돔이 덮인 헬싱키 대성당이 위용을 뽐낸다. 밝은 녹색 돔과 하얀 주랑으로 조화를 이룬 모습이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항구 쪽 언덕에 붉은 벽돌건물이 북유럽 최대의 러시아 정교 교회인 우스펜스키( Uspenskin)사원이다. 금빛 십자가, 청록색 돔, 붉은 벽돌의 조화가 빛난다. 붉은 벽돌로 된 반구형 천장에는 천연물감으로 그린 그리스도와 12사도의 그림이 있다.
원로원광장 동쪽은 헬싱키의 최대 번화가다. 가방, 신발, 의류, 시계, 패션잡화 등을 파는 상점과 식당, 카페가 트램이 오가는 도로 양옆으로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거리 음악가들의 흥겨운 연주도 들려온다. 도로 끝자락에는 세계적인 핀란드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바 알토(Alvar Aalto)가 설계한 건물 1~2층에는 아카테미넨(Akateeminen)서점이 입점해 있다. 2층에는 유명한 '알토 카페'도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가 뻥 뚫린 2층 공간의 천장엔 커다란 채광창이 있어 은은히 새어 들어오는 빛이 책을 보는 사람들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 여행자 사로잡는 걸작 건축물들의 매력
헬싱키에서 가장 핫한 중앙도서관 '오디(Oodi)'는 러시아로부터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개관한 디자인 강국 핀란드의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명소다. 유리와 나무로 되어 노랗게 반짝이는 건물의 외벽은 헬싱키의 파란 하늘과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비정형으로 뻗어나간 건물의 좁고 긴 외벽은 꼭 미래 도시의 조감도를 보는 것 같다.

'오디'는 우리가 갖고 있는 도서관의 고정관념을 깬 복합문화공간이다. 누구나 책을 빌리거나 읽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분위기도 자유롭다. 나선형 계단, 타원형 유리 천장, 새의 충돌 방지를 위한 유리 등 건물 곳곳에 실용적 디자인 요소가 많다. 모두가 평등하게 책을 읽고, 쉬고, 즐기게 하는 게 의무라는 도서관의 정의부터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근 캄피지구 라사팔라치(Lasipalatsi)광장에는 독특한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2012년 헬싱키가 디자인수도로 선정됐을 때 지은 캄피(Kamppi)예배당이다. 광장 한쪽에 커다란 원형 나무통을 세워놓은 것 같은 가문비나무로 만든 캄피예배당은 침묵의 교회로 불린다. 도심 한가운데서 거짓말 같은 고요와 평온을 누릴 수 있는 장소로 작은 강대와 기다란 의자 몇 개가 전부인 예배당 안에선 작은 속삭임조차 금물이다. 그 침묵을 깰까봐 예배당내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예배당 옆 광장에는 동화 속 요정의 마을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모습의 이색 미술관 아모스 렉스(Amos Rex Museum)가 2018년 문을 열었다. 건물을 지으면 추억이 깃든 광장이 사라질까봐 미술관은 넓게 판 지하 공간으로 밀어 넣고, 지상엔 유리천장으로 마감한 돔 지붕이 튀어나오게 했다. 잠망경처럼 생긴 유리천장은 지하의 미술관에 자연광을 끌어들이고, 밤이면 미술관 불빛이 땅 위로 새어나오며 근사한 조명이 된다. 전시 작품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미술관 자체를 보는 즐거움이 크다.

헬싱키 여행의 구심점이 되는 1914년에 건축된 중앙역은 육중한 붉은색 화강암을 사용한 외관이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핀란드 고유의 심플한 디자인을 한 건축물이다. 역 입구를 지키는 4명의 램프를 든 거대한 석상들은 핀란드철도의 마스코트이자 광고모델로도 사랑받고 있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템펠리아우키오(Temppeliaukion)교회는 헬싱키에서 가장 이색적인 명소이자 암석교회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도시 미관을 해치던 보기 흉한 바윗덩어리가 이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가 됐다. 천정과 외벽 사이의 커다란 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고, 건물 내부는 천연 암석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교회 안에는 빛의 마법이 펼쳐진다. 교회에서 나와 올라간 바위 위에서는 발아래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다.


트렘을 타고 찾은 외곽의 시벨리우스공원(Sibelius Park)에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두상과 파이프오르간을 연상시키는 조형물이 서 있다. 핀란드의 목소리라고 불리우는 시벨리우스는 평생을 조국 핀란드에 대한 사랑과 용감한 사람들의 생애를 주제로 작곡하였다. 600백여 개의 강철파이프를 이어붙인 24t의 작품은 덩치와는 다르게 기하학적으로 부드러운 선율을 상상하게 만든다.

◆ 눈길끄는 아름다운 실용 디자인으로 채운 도시
헬싱키는 2012년 세계 디자인 수도로 선정됐을 만큼 디자인과 예술이 가득한 곳이다. 기차역, 공원에 놓인 의자조차 범상치 않은 디자인 요소가 느껴질 정도다. 핀란드 디자인이 인정받는 이유는 실용성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핀란드의 디자인 제품은 '기본에 충실한 것이 최고'라는 말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헬싱키의 다자인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하고 접하기 위하여 디자인 디스트릭트 헬싱키(Design District Helsinki)를 찾았다. 산업디자인, 패션디자인, 그래픽디자인 등 주요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핀란드 디자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다. 네오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현재의 박물관 건물은 1978년부터 디자인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핀란드 건축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전시가 한 자리에 모인 박물관 겸 도서관인 건축박물관(Suomen Rakennustaiteen Museo)은 디자인 박물관 바로 뒤쪽에 있어 입장권도 통합 할인을 받을 수 있다.
헬싱키 아트 뮤지엄(HAM, Helsinki Art Museum)을 약자로 부르면 '햄'이 된다. 입에 찰싹 달라붙는 이름이다. 미술 작품을 통해 시민들이 일상에서 예술을 향유 할 수 있도록 힘쓴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유명한 헬레나 세르팩의 작품과 캐릭터 무민의 작가로 잘 알려진 토베 얀손의 작품도 전시중이어서 흥미를 가지고 재미있게 관람했다.

핀란드 국립 박물관(Finnish National Museum)은 핀란드의 역사 유물이 가득한 종합 박물관으로 가슴 아픈 현장의 확인이기도 하다. 스웨덴 지배, 러시아 지배를 이어 나라를 세운 핀란드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독립 후 1916년 개관 이래 핀란드 국내의 문화, 역사, 고고학적 유물로 가득 찬 최고의 박물관이 되었다. 핀란드에 대한 모든 것을 한자리에서 골고루 보고 싶다면 반드시 방문하자.
헬싱키의 진면목을 느껴 보려면 시장과 항구가 제격이다. 헬싱키 여행자라면 반드시 들러야할 마켓광장 카우파토리(Kauppatori)는 날이 밝으면 이미 분주하다. 매일아침 들어오는 싱싱한 생선과 야채, 과일이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양한 길거리 음식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어 배낭여행자들의 식사 해결에도 제격이다. 마켓광장 옆 실내 재래시장인 반하 카우파할리(Vanha Kauppahalli)는 1914년에 문을 연 핀란드의 대표적인 미식 코스 가운데 하나다.
극야인 헬싱키의 해질녘 태양의 각도는 성당 정원의 나무를, 그 그림자가 비치는 하얀 벽을, 빨강과 녹색의 벤치를 참으로 화사하게 보이게 한다. 내 방은 그리고 이 도시는 극야의 해질녘 황혼에 더욱 아름답게 이 도시에 여행자도 마냥 녹아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용모 대구가톨릭대학교 특임교수 · 전 대구시 도시철도건설본부장
ymahn11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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