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예술의 종말

입력 2021-03-17 11:24:18

리우 영상설치작가
리우 영상설치작가

마르셸 뒤샹(1887~1968)은 소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샘'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일상의 오브제가 미술작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말년에 그는 아예 미술작업을 하지 않고 체스를 두며 무위의 시간을 보낸다. 엔디 워홀(1928~1987)은 슈퍼마켓의 브릴로 상자를 쌓아올려 작품으로 둔갑시켰다. 이 작품을 보고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1924~2013)는 '예술의 종말'을 선언했다.

백남준(1932~2006)은 바이올린을 땅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고, 서서히 들어 올렸다가 전광석화처럼 내려쳐 부수고, 멀쩡한 피아노를 밀어 넘어뜨리곤 했다. 덕분에 그는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존 케이지(1912~1992)는 무대에 올라가 피아노 뚜껑을 열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그냥, 내려왔다. 그가 작곡한? 피아노 연주곡 '4분 33초'다. 관객들은 자신의 숨소리와 기침소리만 감상한 셈이다.

제프 쿤스(1955~ )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석이나 막대풍선 모양 강아지를 확대하여 비싼 값으로 팔며 유명해졌다. 데미안 허스트(1965~ )는 돼지를 반으로 갈라 포름알데히드에 넣어 전시했고, 실제 인간의 두개골에 8천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았다. 제목은 '신의 사랑을 위해'였다.

아, 예술가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예술의 자기 전복적 정체성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 식으로 말하자면 '예술은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형식이다'. 콜럼버스는 계란을 깨서 세웠다. '콜럼버스의 달걀', 발상의 전환이다. 예술은 참을 수 없는 반복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의 형식, 하나의 세계를 깨고 새롭게 태어난다.

그렇게 끝없이 깨고 예술의 정의를 확장시켜 나가면 하얀 캔버스와 텅 빈 전시장만 남겠다(실제로 그런 작품과 전시회도 있었다). 그렇게 예술은 찬란하게 산화한다. 아서 단토의 말처럼 예술의 종말이다. 그러나 예술의 종말은 예술의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생만 짧지, 예술은 길다. 예술을 정의하여 화이트 박스에 가두려는 작가들의 덧없는 시도, 즉 예술의 내러티브가 종말을 맞이했을 뿐이다.

예술가들은 예술을 전복하고 살해하지만, 예술은 오히려 기화하여 우리의 삶과 일상 속으로 스민다. 아니, 사실은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아득한 과거부터 예술은 우리의 삶속에 있었다. 예술은 일상 속에서 매 순간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곳곳에 존재한다.

그런데 어디에나 예술이 있고, 누구나가 예술가라면, 예술가는 구차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바빠 주위에 널린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보는 것은 단지 망막에 비친 이미지가 아니다. 대상과 내가 만나 교호작용해야 한다. 꽃도 이름을 불러줘야 의미가 된다.

시멘트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 작은 꽃. 우연히 발견한 벽면의 균열. 땅에 떨어진 나비. 도시를 닮은 기판.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 그리운 사람… 사람들은 그런 아름다움을 볼 여유가 없다. 보고도 예술인지 모른다. 그래서 굳이 시간을 내어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러 간다. 자신의 감성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이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가다.

리우 영상설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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