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 조광조 이야기
조광조 평전/ 신병주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조광조(1482~1519)는 조선시대, 나아가 한국 역사 전체에서 손꼽히는 개혁가다. 성리학적 이상을 품고 성리학을 조선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으나, 그의 이상은 당대 조선 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불온'한 꿈이었다. 역사의 승리자로 남은 조광조가 정작 당대에는 패배한 이유가 뭘까? 조광조는 성리학이라는 견제 장치를 통해 군주 독재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왕을 견제하려 했다. 중종이 한때 그토록 총애했던 조광조를 갑자기 제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광조가 태어난 15세기 후반은 '사화(士禍)의 시대'였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의 기치를 들고 건국됐지만, 세조의 왕위찬탈 쿠데타인 계유정난이 보여주듯 실제로는 성리학의 이상이 작동하지 않았다. 이에 반발하며 성리학적 질서의 실현을 주장했던 사림파가 도리어 화를 당했던 것이 바로 사화였다. 성종 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는 조선 건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했지만, 훈구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좌절됐다. 특히 연산군은 무자비한 독재 정치를 일삼으며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거 숙청했다.
연산군의 폭정은 큰 반발을 불러왔고,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중종은 성리학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고, 조광조가 역사 속에 등장하게 됐다. 조광조는 도교의 제천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를 혁파하고, '소학'과 향약을 보급해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했으며, 현량과를 실시해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선비들을 정계로 불러들였다.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겨냥한 정국공신 개정과 위훈삭제는 조광조가 추진한 개혁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을 두려워했던 훈구파와 중종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제거,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실패로 돌아갔다. 조광조의 개혁은 당대에 받아들여질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이고 과격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보수 세력이 결집함으로써 조광조의 이상은 결국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는 조광조를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로 기억한다. 조선시대 전문가, 신병주 건국대 교수는 이 책에서 조광조의 삶과 사상을 통해 그의 성공과 실패가 주는 역사적 의미를 짚는다. '개혁'이 화두로 떠오른 요즈음,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그 실패 원인이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이유다. 264쪽.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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