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곤 칼럼] “눈길 함부로 걷지 마라”

입력 2021-02-08 15:02:51 수정 2021-02-08 15:07:17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대사 신임장 수여식에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대사 신임장 수여식에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함께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당선 확정 후 이런 말을 했다. "반대 진영을 악마화하는 참담한 시기를 끝내자" "나와 우리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너도 당신'도 달라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게 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싶으면 1초만 참고 그가 '적'인지 '공동체의 일원'인지를 생각하자"고 했다. 트럼프 집권 기간, 민주 공화 양 진영 간 갈등의 심각성을 역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공화당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의 등장 이후 미국은 4년 내내 홍역을 치렀다. 이제 그 증오와 갈등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의지가 읽혔다.

트럼프는 갔지만 '트럼피즘'의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트럼프 지지자는 아직 건재하고 대통령 선거 사기를 믿는 공화당 유권자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바이든은 미국의 이런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일이 시급하다. 분열과 갈등 치유를 통해 과거 미국의 평판과 입지를 하루빨리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포용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바이든의 개혁 드라이브가 눈에 띈다. 어쨌든 미국은 이제 비정상의 정상화의 길에 접어든 듯하다. 그런데 이런 미국의 새 출발에 괜히 눈길이 가는 것은 왜일까? 한국은 여전히 정권은 독주를 계속하고 있고,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갈등은 도를 더하고 있다.

집권 말기라는 위기감 탓인지 정권의 폭주는 기승을 부리고 있다. 거대 여당을 앞세운 입법과 포퓰리즘, 개각을 틈탄 정권의 내로남불은 점입가경이다. 지난 연말 검찰총장 찍어내기 실패의 후유증도 잊은 듯 이제는 '사법 길들이기'에 나섰다, 하지만 이 역시 대법원장 녹취록이 공개돼 '거짓말 대법원장' 사태를 낳고 말았다. 믿었던 대법원장이 자칫하면 자리보전도 어렵게 됐다. 이는 정권이 멈출 때 멈출 줄을 모르고 상황을 몰각한 때문이다. 여당이 제대로 된 정당이라면 지금은 정국 수습책에 몰두해야 할 때다. 그런데 집권세력은 여전히 집권 초기 힘이 남아있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추락하던 지지율이 잠시 주춤하고 강공 드라이브가 먹힌다 보는 것이다. 4년 전 박근혜의 몰락을 보고도 자제력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4월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내놓는 매표행위에 가까운 정책 남발은 또 어떤가? 손실보상법, 이익공유제에 이은 4차 재난 지원금 등 선거를 앞두고 돈 풀기에 목숨을 건 듯하다. 작년 14조 원에 이르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 덕에 4.15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이 아무래도 크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러다 망신살도 뻗쳤다. 2월 국회에서 입법을 추진했던 손실보상법은 소급 입법이 안 돼 법을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는 점을 몰랐다. 거대 여당이 의원 수만 많았지 입법 능력은 문제투성이다. 결국 손실보상법을 포기하고 4차 재난지원금을 들고 나왔지만 이제는 재정당국과 조율이 안돼 삐걱댔다. 여당 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보편이든, 선별이든 4차 재난지원금을 하겠다" 했는데 경제부총리가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발끈해서 여당이 부총리 사표를 종용하자 그 부총리는 울먹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조국 임명에서 두드러졌던 코드 개각도 문제다. 윤석열 사태 조기 수습을 위해 추미애를 경질하고 임명한 박범계 장관은 '포장만 바뀐 추미애' 소리를 듣는다.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야당 동의 없는 27번째 장관'으로 임명했지만 윤석열 검찰 총장과의 관계가 벌써 심상찮다. 박범계식 '윤석열 패싱'은 이미 '추미애 시즌 2'로 접어든 느낌이다. 이어진 개각에서 새로 장관이 된 사람들도 매한가지다. 권칠승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황희 문화체육부 장관 후보자는 딸과 관련된 비난을 받고 있다. 말로는 '평준화 교육' '특목고 폐지'라고 해놓고 자신의 딸들은 모두 특목고와 외국인 학교에 보낸 것이다. 온갖 부정과 반칙으로 자신의 딸을 의전원을 거쳐 의사로 만든 조국과 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남의 자식들에게는 "용이 되려고 하지 말고 개천에서 가재' 붕어' 개구리로 살라"고 하니 이젠 '내로남불'이란 비난도 성에 차지 않을 정도다.

이런 와중에 정권의 뻔뻔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북한 원전 지원 의혹을 제기하는 야당 대표에게는 대통령까지 나서 '구시대 유물'같은 정치를 한다며 공격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북한의 김정은에게 준 USB 공개는 못하겠다고 버틴다. USB 내용만 공개하면 될 일을 청와대 정무수석은 야당에 명운을 걸라며 겁박까지 했다. 버틸 수만 있다면 최대한 우기고 협박해서 견뎌보자는 작전이다.

청와대 대통령 회의실 앞에는 김구 선생의 글씨가 한 폭 걸려있다고 한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로 시작되는 글귀로 서산대사의 글로 알려져 있다. '눈 내리는 벌판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말라는 뜻이다. 오늘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회 과반을 넘는 170여 석의 집권세력은 의석 수를 믿고 폭주 중이다. 무리한 입법을 통한 내편 네 편 가르기는 쉼이 없다. 또 1년여밖에 남지 않은 정권임에도 검찰과 사법 장악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이 나라에서 뻔뻔하게 '심판 매수'를 시도하고 있으니 정말 가관이다. 국회 의석 수와 맹목적 추종세력인 '문빠'를 믿고 벌이는 일이지만 착각이고 오판이다. 트럼프가 막판까지 광기의 트럼프 지지자들에 기대, 무모한 의사당 점거를 시도한 일을 기억할 것이다. 옛사람이 괜히 "눈길 함부로 걷지 말라"고 경고한 게 아니다. 청와대 복도에 세금까지 들여 '백범'의 글씨를 걸었다면 그 뜻도 제대로 새겼으면 한다.

이상곤 전 청와대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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