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되면 아이의 손을 잡고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코끝을 스친 겨울바람은 움츠렸던 몸에 숨을 불어넣는다. 나지막한 등산로 곳곳에는 운동기구나 벤치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도 좋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아이의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어느 새 집 앞으로 들어선다. 키즈카페나 박물관, 전시관 등 각종 체험관을 돌아다니던 예전에는 몰랐던 시간들이다.
동네를 돌아다니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 맛 좋은 동네 빵집과 가성비 뛰어난 파스타 가게도 찾아냈고, 예쁘게 리모델링한 골목 안 단독주택들도 눈에 띈다. 웬만한 물건은 온라인 쇼핑으로 해결하고 간단한 생필품은 동네 슈퍼마켓에서 산다. 집과 동네의 재발견이다. 코로나19로 생활 반경은 좁아졌지만 집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 다층적 공간으로 변하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좁아진 삶의 반경 안에서 삶의 질을 채워 가려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슬세권'(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닐 정도의 권역) 2.0의 시대다.
BC카드 빅데이터센터에 따르면 2019년 전체 이용자의 10%에 불과했던 '동네소비형' 고객은 지난해 13%로 증가했다. 반면 집에서 5㎞ 이상 떨어진 곳에서 소비하던 원거리 고객은 2018년 39.6%에서 지난해 36.7%로 3%포인트 줄었다.
'슬세권'은 IT 기술을 바탕으로 온·오프라인을 결합하며 더욱 풍부해졌다. 동네 주민들이 중고 물품을 사고파는 당근마켓은 '겨울 간식 지도' 서비스를 제공한다. 네이버 카페도 이용자가 관심 지역을 설정하면 동네 소식을 보여 주는 '이웃' 서비스를 출시했다.
공유 킥보드는 동네를 오가는 이들의 발이 되고 있다. 대구 도심 곳곳에서는 공유 전동 킥보드인 보라색 '빔'(Beam)이나 노란색 '씽씽'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19의 파도는 올해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강력한 백신이 대기 중이고,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도 일상이 됐다. 하지만 감염의 공포가 사라져도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학교와 직장은 제자리로 돌아가겠지만 온라인을 기반으로 사람들과 연결하는 '온택트'(On-tact) 시대는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사회적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노출돼 있는 소외 계층에게 집과 동네는 단절의 공간에 불과하다. 비대면 시대, 복지 사각지대는 더욱 넓어지고 취약 계층은 방치된다. ICT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노인들은 스스로 고립돼 필요한 정보나 도움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훼손한다. 사회적 자본은 공동체를 기반으로 상호 협동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만들어내는 무형의 자산을 말한다. 그러나 계층과 세대 간의 분단과 불평등은 개인과 정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킨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국내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신뢰는 앞으로 계속 한국이 장기적으로 유지해야 할 사회적 자본"이라고 했다.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가 한국에 있어 앞으로 주요한 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코로나19의 종식은 단순히 전염병의 징후가 사라졌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모두가 건강한 일상으로 함께 돌아갈 때 완성된다. 코로나19라는 재난이 배려와 양보, 희생과 봉사를 통한 신뢰 자본을 늘릴 소중한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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