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병호시비 마침표…영남 유림, 호계서원서 화합 한자리

입력 2020-11-20 16:37:18 수정 2020-11-20 20:58:36

안동 호계서원 이건·복원 완료…고유제·추향례 봉행
좌배향 갈등 종손 대타협 매듭…퇴계·서애·학봉·대산 順 위패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를 마치고 이철우 경북도지사, 권영세 안동시장, 임종식 경북도교육감, 조재연 대구지방검찰청장, 윤동춘 경북경찰청장, 이상오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장, 경북 시·군 유림 대표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윤영민 기자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를 마치고 이철우 경북도지사, 권영세 안동시장, 임종식 경북도교육감, 조재연 대구지방검찰청장, 윤동춘 경북경찰청장, 이상오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장, 경북 시·군 유림 대표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윤영민 기자

좌배향(左配享)을 둘러싸고 서애와 학봉 문중 간 빚어졌던 400년 '병호시비'(屛虎是非)를 끝낸 안동현의 수(首) 서원인 호계서원(虎溪書院·경북도 유형문화재 35호) 이건과 복원사업이 마무리됐다.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위원장 노진환)는 20일 이건·복원된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한국국학진흥원 부지 내 호계서원에서 복설 고유제와 추향례를 봉행했다.

이날 고유제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 권영세 안동시장, 임종식 경북도교육감, 조재연 대구지방검찰청장, 윤동춘 경북경찰청장, 이상오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장, 이동관 매일신문 편집국장, 경북 시·군 유림 대표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서원 숭교당에 제의를 마치고 사당에서 고유제와 추향례를 올렸다.

호계서원은 1573년(선조 6)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퇴계 이황(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월곡면 도곡동에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이 때는 여강서원(廬江書院)이라 했다. 1620년(광해군 12)에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을 추가 배향했으며, 1676년(숙종 2)에 '호계'(虎溪)라 사액됐다.

이후 이황은 도산서원, 김성일은 임천서원, 유성룡은 병산서원에서 주향(主享)함에 따라 호계서원은 강당만 남게 됐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호계서원은 임하면 임하리 임하댐 곁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이건됐다.

영남 3대 시비 중 하나로 알려진 '병호시비'는 퇴계 제자들이 호계서원을 세우고 퇴계 위패를 봉안하면서 두번째 서열인 왼쪽 위패를 누구의 것으로 하느냐의 문제를 두고 벌어졌던 시비를 일컫는다.

당시 학봉 문중은 좌배향을 두고 나이에 따라, 서애 문중은 관직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봉은 서애보다 4세 연상이고 퇴계 문하에 먼저 들어간 입제자였으나, 벼슬은 영의정을 지내면서 서애보다 낮은 관찰사에 머물렀다.

병호시비는 지난 2009년 안동시가 임하면 임하리에 있는 호계서원을 복원키로 하면서 다시 불거졌다가 서애의 류영하 종손과 학봉의 김종길 종손이 만나 퇴계 왼쪽에 서애, 오른쪽에 학봉의 위패를 봉안하기로 대타협을 이루면서 매듭지었다.

당시 지역 유림들은 대산 이상정 선생의 위패를 학봉 곁에 추가 배향키로 하면서 호계서원에는 퇴계 이황·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대산 이상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노진환 위원장은 "이 시간을 기점으로 '병호시비'라 일컬어진 오명을 깨끗이 씻어내고 오랜 영남 유림의 갈등을 일소함으로써 호계서원이 유림 화합의 상징이 되고 만세 후인들에게 귀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호계서원에 모실 퇴계 이황·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대산 이상정의 위패를 쓰고 있다. 윤영민 기자
호계서원에 모실 퇴계 이황·서애 류성룡·학봉 김성일·대산 이상정의 위패를 쓰고 있다. 윤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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