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창] 사회적 거리두기

입력 2020-11-17 09:25:00

이장훈 경북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
이장훈 경북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다. 여러 층에 설 때마다 가족도 타고 혼자 타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스크를 한 채 다들 말이 없다. 서로 조금씩 떨어져 불편 해 할 뿐, 어색한 침묵만이 좁은 엘리베이터안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서로 인사를 잘하는 젊은 아파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아파트 라인에서 코로나19 사망자가 나온 이후로는 서로 마스크만 한 채 말이 없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코로나19가 바꿔 놓은 풍경이다.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이에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를 세분화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란 공중보건학적 의미로 개인 또는 집단 간 접촉을 최소화하여 감염병의 전파를 감소시키는 감염병 통제 전략을 말한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속될수록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편한 걸까?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 가장 큰 차이점은 사회성이 높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성은 다른 영장류보다 상대적으로 더 큰 뇌의 크기에서 비롯된다. 영장류는 뇌의 크기가 클수록 사회성이 증가하고, 집단생활의 규모도 커진다. 집단생활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 수렵 및 채집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집단 내 짝짓기를 통해 빠르게 개체 수를 늘려갈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집단내 연장자가 생존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전수해 주면서 후세는 위험에서 벗어나 수명을 늘려갈 수 있었다. 산업혁명 시대의 '분업'은 소통과 사회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이러한 인류의 사회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살아남기 위해 인류가 지금껏 생존해 왔던 사회적 집단생활이라는 방식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옆 사람이 재채기를 하면 "갓 블레스 유(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를 외치곤 한다. 이는 14세기 유행한 페스트의 초기 증상이 재채기였던 데서 유래했다. 이처럼 감염병은 우리의 관습과 문화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기도 한다. 코로나19는 이미 마스크를 쓰는데 부정적이었던 서양의 문화를 바꾸어 놓았다. 찌개를 공동으로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던 우리의 문화도 개인 그릇에 찌개를 덜어서 말없이 식사를 하는 문화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아직 새로운 생활규범이 정립되지 않았다. 당장 옆사람이 기침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옳은 걸까? 학교에서 교육은 어떤 형태로 이뤄져야 하는지(비대면 교육), 병원에서 의사는 환자를 어떻게 진료해야 하는지(원격의료), 교회와 같은 종교 시설이나 영화관, 서점, 박물관, 식당등 대중시설에서는 어떻게 생활(거리두기) 해야 할까? 코로나19에 걸린 것이 죄는 아니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회복된 후에도 따가운 시선으로 인한 사회적 고립을 피할 수 없다.

사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단어 자체가 모순적인 조합이다. 사회적이면서 거리를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류가 핵가족화 하면서 이미 사회성이 감소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오히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일상 생활을 하나하나 공유하는 전에 없던 '과잉 소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편한 것이다. 연대와 공감은 여전히 인류생존의 필수 전략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단순한 '물리적 거리두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심리적 거리두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장훈 경북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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