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거리두기와 격대(隔代)

입력 2020-07-21 06:30:00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 암송하지 못하면 사정없는 회초리가 나의 종아리를 향하여 날아들었다. … 내가 싫어하는 사람, 제1호는 할아버지였다. … 항상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상투에다 갓을 쓰고 다니셨다. …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 나는 그렇게 슬퍼하지 않았던 것 같다. …."

지난 2016년 중국의 한 일간지 소개에 이어 2017년 중국 베이징대학 출판사에서의 '고급 한국어'에 '매화 그늘을 서성이며'라는 제목으로 실린 경북대 정우락 교수의 글이다. 그는 대학에서 공대에 진학했다가 갑자기 그만두고 다시 국문학을 전공했고, 이후 할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은 글을 썼다.

유림의 삶을 살며 '나는 문명이 싫어!'라며 전기조차 거부한 채 호롱불 아래서 손자에게 회초리를 대 가며 한문을 가르친 할아버지 정재화를 그는 싫어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그의 앞날과 운명을 바꾼 공부는 자신이 택한 공대가 아니라 할아버지에게 매로 배운 한문이었고 삶도 바뀌었다.

'나뭇잎이 선홍의 피를 뚝뚝 흘리며 사라져 가던 가을 어느 날 한문 공부를 향하여 다시 눈을 들었'던 그는 '달 밝은 밤, 집 사랑 마당 매화 향기가 갑자기 엄습해 오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매화나무 그늘 사이를 서성이던 할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옛 학문을 한다며 세상과 거리를 두며 절연(絶緣)한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호된 교육 덕분인지 그는 옛 사람이 남긴 숱한 한문 작품을 한글로 풀어 세상에 내놓았고, 그의 글이 중국 책에까지 실리고 명성도 얻었으니 할아버지를 향한 사무친 그리움은 더할 만하다. 6월 끝 무렵, 생전 할아버지 작품 중 107점과 할아버지를 기린 글을 모아 '후산졸언 시문선집'을 낸 까닭이다.

정 교수와 할아버지에 얽힌 가르침과 배움의 이야기는 오늘날 드문 격대(隔代) 교육의 사례가 될 만하다. 마침 대구교육박물관이 6월부터 10월까지 '넉넉한 가르침, 격대 교육'을 주제로 전시 중이다. 동서양 사례 등도 전시한다니, 조손(祖孫) 즉 할아버지·할머니와 손자·손녀 사이 이뤄지던 옛 격대 교육을 되돌아볼 기회이다. 코로나에 거리두기가 소환되더니, 교육에서도 거리두기의 격대 교육이 관심이다. 세상 일은 돌고 도는 모양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