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서 결혼 사십 년을 맞았다. 고맙게도 그간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왔다. 아내는 나의 일이나 생활습관 등에 대해서 별 말없이 잘 따라 주며 가장의 대우를 해주었다. 그런데 일흔을 넘기고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점차 잔소리가 많아졌다. 나의 어둔함이 자꾸 눈에 뜨인 때문이었다.
한번은 이웃 혼사에 빈 봉투를 축의금으로 낸 일이 있었다. 집에서 정성스레 봉투를 마련했는데 그 안에 돈을 넣지 않은 채 접수했던 것이다. 다행히 다음 날 전후사정을 감지한 혼주가 귓속말로 알려주어 얼른 송금했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황당한 그 사건을 들은 아내는 순간 안색이 핼쑥해졌다. 그 후, 아내는 '물가에 내 놓은 아이' 운운하며 부쩍 나의 행동거지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듣기 좋은 말도 한 두 번이라고, 급하게 현관을 나서는 사람에게 휴대폰을 챙겼느냐, 비가 예상되니 샌들대신 구두를 신으세요 등의 말들은 멀쩡한 사람을 아주 우습게 보는 지나친 참견으로 들렸다.
우리 아파트노인회에서는 매월 월례회 겸 점심식사를 한다. 회원들이 대개 팔십대 이상임을 알고 있는 나는 몇 번 초대를 받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비슷한 또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올봄 이십년 지기 형님뻘인 L이 회장이 된 후 사정이 달라졌다. 매사 적극적인 그는 월례회 며칠 전부터 꼭 나와야한다고 채근했다. 참석인원이 많아야 위세가 선다며 간청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알려준 식당에 나갔다.
식당에는 이미 이십여 명이 모여 있었다. 한쪽에는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들이, 다른 한 쪽에는 점퍼 등 간편한 차림의 할아버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여섯 분은 안면이 있었다. 한 눈에도 내가 가장 연소자 같았다. 마침 사인용 식탁에 빈자리가 있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앉았다. 음식이 나오기 전 신상파악을 위한 질문이 한 순배 돌았다. 나이, 퇴직 전 직업, 고향 등등 이었다. 나의 맞은편과 옆자리에는 전직 공무원, 이곳이 고향인 건물주 그리고 나보다 스물네 살이나 많은 구십 육세 상노인 한 분이 계셨다. 한국 전쟁 참전용사라며 휘장을 새긴 붉은 모자를 내 보였다. 말도 또렷하고 소주 두어 잔을 거침없이 비웠다. 대부분의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자녀들은 멀리 있고, 이곳에서 부부 두 분만 사신다고 했다.
노인들의 대화는 주로 자신이나 동료의 장래에 대한 것이었다. 후손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생을 평안히 마무리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칠십대 초반인 나의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앉는 여러 가지 사회현상을 개탄하고 걱정하며 열변을 토하는 편이지만 이분들은 그 단계를 넘어선 듯했다. 세상사보다 눈앞의 전골 국물이 싱거운지 짠지를 두고 서로 의견이 엇갈렸다.
식사 후 모두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식당이 아파트인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우연히 백수를 바라보는 상노인 부부와 또 다른 서너 명의 일행과 함께 걸었다. 노부인도 정정했는데 식당을 나설 때부터 새초롬한 얼굴로 무언가 자기 남편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저 고집쟁이 영감탱이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옆의 상노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는 실실 웃었다.
"오늘 외출 때 깨끗한 양복바지를 입지 않았다고 저래 타박을 하네."
노인의 바지는 다른 사람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눈에 띄게 화려하거나 다림질 줄이 선명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후줄근하지도 않았다.
"저 영감탱이는 언제나 자기 멋대로야."
성이 차지 않았는지 노부인이 옆의 사람이 다 들을 수 있게 또 쏘아댔다. 소중한 남편을 번듯하게 드러내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영감탱이'는 좀 심하다고 생각했다. 얼핏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극성엄마가 연상되었다. '내일 모레가 백세이신데, 이제 좀 놓아드리면 안 되나.' 잔소리가 심해지는 아내를 생각하며 나는 침울해졌다.
아파트 정문에 이르렀을 때, 계단을 오르느라 상노인이 뒤뚱거렸다. 얼른 그의 팔을 잡고 부축했다. 마른 나무 가지처럼 쇠약한 그의 팔이 한 줌에 잡혔다. 숨소리가 불안스레 밭았다. '아, 이런 노인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자기주장의 밧줄을 끝까지 당겨 쥐고 놓아주지 않는 할머니의 처사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짢은 마음에 뒤따라오는 할머니를 힐끗 돌아보았다. 연초록 겉옷으로 한껏 멋을 부린 노파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태평스레 옆의 할머니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계단을 다 오른 후 우리는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쉬었다. 그때 상노인은 장난스런 미소를 띠며 뜻밖의 고백을 했다.
"우리 집 할망구는 내게 잔소리하는 하는 재미로 산다네. 심심치 않아 나도 좋아."
순간 나는 노부부의 속마음을 알았다. 저들은 무료한 노년의 적막함을 달래기 위해 짐짓 상스런 잔소리를 하고 서로가 그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친한 친구사이의 아슬아슬한 농지거리나 곧 주먹다짐을 할 듯이 함부로 내 뱉는 거친 언사가 기실은 그들만의 탄탄한 친밀감을 나타내듯이 이분들도 수십 년을 함께한 희로애락의 사랑표현을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울했던 내 마음속 먹구름이 확 걷히며 백수를 바라보는 상노인부부가 어찌하여 바깥출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정한지 짐작이 되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내게 '대낮부터 웬 술을'이라는 아내의 참견이 더 이상 잔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잔소리가 점점 발전해서 언젠가는 '영감탱이'가 되고 내 입에서도 '할망구'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오면 좋겠다. 노부부의 잔소리, 그것은 어쩌면 이승에 혼자남기 전 두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유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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