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불안한 안정보다 자유로운 결핍을

입력 2020-07-17 14:30:00

기억 전달자(로이스 로리/ 장은수 옮김/ 비룡소)

정순희_눈밭
정순희_눈밭

검은 표지에 The Giver란 제목이 강렬하다. 텁수룩한 수염과 주름투성이의 남자가 고뇌에 찬 눈빛으로 오른쪽을 바라본다. 무겁고 비밀스러운 표정이다. 호기심을 품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의 중반을 훌쩍 넘길 정도로 가독성이 있다.

로이스 로리는 '별을 헤아리며' '래블 스타키' '기억 전달자' 등의 작품으로 미국 청소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별을 헤아리며'와 '기억 전달자'는 그녀에게 뉴베리상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특히 여러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가장 사랑을 받았던 '기억 전달자'는 미래 소설의 종합판으로 불린다.

책을 열자마자 나타나는 생소한 단어들을 따라 가면 묘한 긴장감이 인다. 기초가족, 대체아이, 이름받기, 공개기록보관소, 임무 해제, 열두 살의 기념식 등등.

열두 살의 기념식은 각자 미래의 할 일을 결정하는 직위를 받는 날이다. 조너스는 자신이 어떤 직위를 받을지 기대와 두려움으로 그 날을 기다린다. 조너스가 사는 세상은 어떤 오류도 없이 질서 정연하고 조직적인 커뮤니티다. 이들을 움직이는 원로회의는 태어나 12년 간 그 사람을 면밀히 살피고 특성을 파악한 뒤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직위를 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쇠약해지면 임무 해제를 시킨다.

그러나 언제나 '늘같음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원로회의는 엄청난 문제를 덮어두고 있다. 배우자 심사에서 산아제한, 안락사, 신체 조건에 대한 차별,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을 다 지웠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딱 한 사람, 기억 전달자만이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다. 기억 보유자의 직위를 받은 조나단은 기억 전달자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받기 위해 훈련을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기억을 품을 수 없나요? 모두 조금 기억을 나눈다면 일이 쉬울 거라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이 일에 참여한다면 기억 전달자님과 제가 그렇게나 고통을 떠맡을 필요가 없잖아요.'(193p)

모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오직 기억 전달자 혼자만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은 감내해야만 하는 규칙이다. 그리고 새로 정해진 기억 보유자에게 그 기억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커뮤니티의 실상을 알게 된 조나단은 기억 보유자의 명예를 버리고 완전한 이곳으로부터 탈출을 꾀한다.

공포와 상처와 욕망을 지우고 최상의 의식주와 미래의 안위까지 책임져 주는 삶이라면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삶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한다.

사랑, 희망, 기쁨은 완벽하게 포장된 완성품이 아니라 미움을 통해 사랑의 진정성을 알게 되고, 절망의 벽에 부딪치면서 희망을 배우는 것이다. 슬픔의 겹이 더해질수록 기쁨의 가치 또한 절절이 다가오기에 미움과 절망과 슬픔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랑다운 사랑, 희망다운 희망, 기쁨다운 기쁨은 누릴 수 없다. 신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참된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극과 극의 삶을 허용한 것일까.

조너스는 곧 임무해제를 당할 위기에 처한 가브리엘을 자전거에 태우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이곳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자유의 표현이고 인간다운 외침이다.

'이제 그 빛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빛은 유리창 너머에서 번져 나왔다. 가족들이 함께 기억을 만들고 간직하며 사랑을 축복하는 방안의 나무에서 반짝거리는 빨강 노랑, 파랑의 빛이었다.'

설산에서 썰매를 발견한 조너스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나 드디어 희망을 만난다. 모든 색깔을 빼버린 무채색의 커뮤니티, 불평할 것도 그렇다고 의욕적으로 도전할 일도 없었던 불안한 안정보다 자유로운 결핍의 세계를 선택한 그의 용기가 놀랍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갈등과 분열, 뜻밖의 재앙으로 얼룩질 미래를 생각하며 차라리 우리의 자유를 다 주고서라도 안전한 세상을 갖고 싶은지, 아니면 조너스가 색색의 빛깔을 아름답게 여긴 것처럼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현실의 이곳을 사랑할 것인지….

정순희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