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경북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회색을 좋아한다. 언제부턴가 햇빛 밝은 날보다 잿빛 구름 낮게 드리운 흐린 날이 더 좋다. 옷도 회색 계통이 많다. 왜 그런가 생각해 봤더니, 회색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데다 왠지 마음을 안정시켜 주기 때문인 것 같다. 교환교수로 몇 차례 독일에서 생활한 적이 있는데, 착 가라앉은 잿빛 날씨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내는 물론 자주 만났던 독일 대학 교수는 그런 필자를 보며 매번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가슴을 뛰게 했던 이름난 두 편의 수필이 있다. '청춘예찬'과 '신록예찬'이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예찬'의 이 첫 구절처럼 '신록예찬' 역시 푸르른 신록의 청춘을 찬미한다. 괴테가 '질풍과 노도(슈투름 운트 드랑)'의 청년기를 지나 원숙한 고전주의의 세계로 들어갔듯이, 필자는 회색을 예찬함으로써 괴테를 흉내 내 보려 한다.
회색은 검은색과 흰색 사이,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중간색이다.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곳을 '회색지대', 그런 사람을 '회색인'이라고 낮춰 부르는 이유다. 우리 한국의 경우 특히 어느 한쪽에 확실히 서야 회색인을 면할 수 있다. 과연 그런가. 회색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때에 따라서는 어느 쪽도 되는 기회주의의 대명사인가. 긍정적인 의미는 없는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회색은 흰색에서 검은색에 이르는 색상과 채도가 없고 명도만 있는 무채색이다. 회색에는 진회색에서 연회색까지 명도가 다른 여러 색깔이 있다. 검은색이 짙을수록 진회색, 옅을수록 연회색이다. 따라서 회색이 검은색도 흰색도 아니라는 말은 틀리지는 않지만 꼭 맞는다고도 할 수 없다. 오히려 검은색과 흰색 모두를 포용하는 넉넉한 색깔이라고 해야 온당한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회색은 흑과 백 두 대립되는 색이 변증법적으로 지양된 제3의 색깔, 화해와 통합의 색깔이라고 할 수 있다. 화해와 통합의 회색, 독일문학의 색깔이 바로 이 회색이다. 필자는 독문학도들의 필독서인 '독일비평사'(김주연 저)의 서문에 깊이 공감한다. "독일문학의 빛깔은 회색빛이다. 독일의 하늘 빛깔만큼이나 회색빛이다. 회색은 양극을 지양하는 양보의 색깔이다. 따라서 독일문학 여행은 통합된 초월로의 비상이다."
독일어로 1월은 '야누아르(Januar)'이다. '야누스(Janus)의 달'이라는 뜻의 라틴어 '야누아리우스(Januarius)'에서 나왔다. 로마신화에서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가진 문(門)의 신인데, 매년 1월 한 얼굴은 문 뒤를, 다른 한 얼굴은 문 앞을 내다본다. 흔히 야누스가 이중인격적인 기회주의자의 뜻으로 쓰이지만, 본래 의미는 그게 아니다. 두 얼굴의 야누스야말로 온전한 인격과 삶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만을 고집하는 외곬의 신념으로는 중용적인 삶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네 삶의 현장에는 언제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면서 공존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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