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윤 시인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이 실렸다. 주필이자 사장이었던 장지연이 쓴 글로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는 뜻이다. 요지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비판한 글이었지만, 매국에 앞장선 정부 대신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강한 글이다. 개인의 영달과 이익을 바라고 일본의 위협에 겁먹고 두려워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에 비유했던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계략은 도적들에 의해 경술국치조약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지식인들도 소신에 따라 애국과 매국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변절'이라는 생채기를 남겼다.
최남선은 1919년 3·1운동 당시 손병희의 대원칙에 의거하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때문에 2년 8개월간 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스스로 자청한 일이었고 구국의 횃불을 들었던 그는 애국자였다. 그에 앞서 1908년 11월에 창간된 '소년'에 권두시로 신체시(新體詩) 또는 신시(新詩)로 알려진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가식의 권력들을 비웃는 여유와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소년들에게 호연지기를 당부했다. 특히 5연에서는 작은 시비와 싸움 등의 온갖 더러운 것들은 바다의 짝이 될 수 없다고 했다. 티 없이 맑고 푸른 하늘만이 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정작 그가 바다와 하늘의 짝이 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만약 해(海)가 바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욱일(旭日)을 은유한 것은 아니었을까. 괜한 추론에 혼자 가슴을 쓸어내린 적도 있다.
정치계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계에서도 애국지사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은 여럿이다. 처음부터 개인의 영달(榮達)을 도모한 사례는 부지기수여서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작품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작품의 위용(偉容)을 높이 산다할지라도 그건 작품에 국한될 뿐, 그들의 친일행적까지 미화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매년 각종 문학상들이 제정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이름을 문학상 앞에 두는 것은 문학인으로서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솝 우화에 낙타와 아라비아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추운 밤 사막에서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는 주인에게 낙타가 말을 건넨다. 하루 종일 걷느라 지친 발을 천막에 들이는 걸 허락받더니, 마침내 제 몸통까지 들어섬으로써 결국 비좁아진 천막에서 주인이 밖으로 쫓겨난다는 이야기다. 물론 다소 과장되고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는 아니다. 이 땅에서 벌어졌던 불평등 강제조약이나 국욕(國辱)의 역사도 느닷없는 홍두깨는 아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서서히 매국에 일조한 세력들이 만들어낸 사건인 것이다. 종묘사직과 선비정신을 중히 여기던 이 땅에서 처음부터 나라 팔아먹는 일에 흔쾌히 응했던 이들이 몇이나 되었을까. 그들은 해방이 된 이후에도 요직들을 섭렵하며 정치와 문화계에서 권문세가의 영욕을 누려왔다. 농단의 중심에서 우리를 사지로 내몰았던 세력들이 대부분 그들의 잔당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결코 이 땅에서 비겁과 오욕의 씨앗이 자라날 수 없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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