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입력 2020-04-03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좌파의 천둥이 번개로 바뀌었다. 오늘 유일하게 정지 동작으로 볼 만한 장면이 있다면, 사람들이 처음 결과를 들었을 때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일 것이다." 1945년 7월 5일 실시돼 26일 개표 완료된 영국 총선 결과에 대한 영국인들의 반응을 맨체스터 가디언(현재 가디언)은 이렇게 전했다. 총선에서 노동당은 393석을 얻어 단독 내각을 구성하게 된 반면 보수당은 213석을 얻는데 그쳤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영국을 구한 처칠의 실각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참패였다. 여론조사에서 보수당 지지율은 최고 83%, 가장 저조(?)할 때조차도 78%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노동당조차도 승리에 어리둥절해 했다. 맨체스터 가디언이 전하는 노동당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의 반응은 이를 잘 보여준다. "애틀리는 차분하고 신중했다. 다소 피곤해 보이기까지 했다."

보수당 지지자들은 당혹을 넘어 배신감마저 들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위대한 인물에 대한 배은망덕이란 것이다. 그러나 '배은망덕'은 예정된 것이었다. 영국 국민은 전시에는 처칠의 '전쟁 리더십'이 필요하지만, 전후에는 복구와 새로운 사회 건설에 요구되는 '전후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칠은 복지국가로 나아가되 천천히 가야 한다고 했는데 영국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처칠은 이런 변화의 저류(底流)를 보지 못했다. 이게 패배의 원인이었다. 정보 장교 출신으로 케임브리지대 킹스칼리지 학장을 지낸 노엘 애넌의 회고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노동당에 투표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썼다. "처칠을 숭배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처칠이 전후 국가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4·15 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지만, 분위기는 너무도 가라앉아 있다. 우한 코로나가 선거 이슈를 삼켜버린 때문이다. 그래서 이대로라면 총선 결과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를 다시 경험하기를 원치 않는 국민의 희망과 어긋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가시적인 흐름은 분명히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처칠의 패배는 이런 가시적 흐름에 시야(視野)를 빼앗기지 말 것을 경고한다. 처칠의 패배를 불러온 저류가 지금 이 나라에도 패연(沛然)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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