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창의성] 은행나무: 세계문화유산 서원의 싱징 나무

입력 2019-12-02 18:00:00

강판권(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강판권(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도동서원앞 은행나무.일명
도동서원앞 은행나무.일명'김굉필나무'

은행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은행나무는 우리나라 서원을 상징하는 나무다. 올해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구의 도동서원,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경주의 옥산서원,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을 비롯해서 전국의 서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은행나무가 살고 있다. 우리나라 서원의 은행나무는 조선 성리학의 상징 나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울의 성균관과 각 군의 향교 및 양반의 주택과 정자, 성리학자들의 공간인 서당 등에서도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1707~1778)가 붙인 은행나무의 학명(Ginkgo biloba L.)에는 원산지 표시가 없지만 대부분의 식물학자들은 중국 절강성 천목산을 은행나무의 원산지로 꼽는다. 은행나무가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왔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지만 현장에 있는 나이 많은 은행나무가 주로 사찰 주변에 있는 점으로 보아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1천150살의 은행나무도 경기도 양평군에 위치한 용문사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성균관에서 보듯이 성리학 공간에도 나이 많은 은행나무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 성리학 공간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공자가 제자를 가르친 행단(杏壇) 때문이다. 행단의 '행'은 살구나무의 한자 이름 중 하나이다. 은행나무와 살구나무는 전혀 다른 나무인데도 우리나라 성리학 공간에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은 이유는 관련 자료가 없어서 확인할 수 없다. 중국에서는 행단의 나무가 살구나무이다. 공자를 모신 산동성 곡부의 행단 앞과 송나라 3대 서원 중 하나인 하남성의 숭양서원 앞에 살구나무가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살구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성리학 공간의 상징 나무로 선택한 사실을 문화변용이라 해석한다. 이 같은 현상은 은행나무의 이름이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은 중국 송나라 때부터 본격 사용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송나라 이전 은행나무의 대표적인 이름은 '오리 다리를 닮은 잎'을 의미하는 '압각수'(鴨脚樹)였다.

압각수가 은행나무의 잎을 강조했다면 은행나무는 열매를 강조한 이름이다. 은행은 은빛 살구, 즉 열매의 과육을 벗긴 모습이 살구나무의 열매를 닮았다는 뜻이다. 은행나무의 또 다른 이름은 공손수(公孫樹)다. 공손수의 '손'은 '손자'를 의미하고, '공'은 은행나무를 공작 벼슬에 비유한 것이다. 이는 은행나무의 암수가 수정한 후 손자대에 이르러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지만 반드시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은행나무는 오랜 시간이 지나야 열매를 맺는다.

대구의 도동서원 앞에도 400살의 은행나무가 있다. 세계문화유산 도동서원은 성리학자이자 조선의 동방오현 중 수현인 한훤당 김굉필을 모신 곳이다. 도동서원 앞의 은행나무는 대구시에서 '김굉필나무'라 이름 붙였다. 도동서원과 인접한 한훤고택 앞에도 400살 정도의 은행나무가 있다. 두 곳의 은행나무는 이른바 행단에 해당한다.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에 위치한 행동재(杏東齋) 앞에도 두 곳의 은행나무와 나이가 비슷한 한 그루 은행나무가 있다. 행동재의 '행'은 살구나무를 의미하지만 실제는 은행나무이다. 행동재의 은행나무도 문화변용에 해당한다. 행동재의 은행나무는 도동서원의 은행나무를 심은 한강 정구가 창녕 현감 시절에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구가 행동재 앞의 은행나무를 심은 것은 행동재의 주인공이 김굉필의 둘째 아들이고, 그가 김굉필의 외증손이었기 때문이다.

도동서원의 김굉필 선생 신도비 옆에도 한 그루 은행나무가 있다. 신도비 옆의 은행나무는 김굉필나무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은행나무를 두 그루 심는 사례에 해당할 수 있다. 성리학 공간에 은행나무를 두 그루 심는 것은 이 나무가 암수 딴그루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대표적인 사례는 서울의 성균관, 충남 아산의 맹씨행단, 경북 청도의 자계서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서원은 물론 전국 서원의 은행나무는 그 자체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전국 서원에 있는 은행나무에 대한 관리는 허술하다. 이는 성리학의 상징 나무를 중요한 문화재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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