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흔적]<49>벼루

입력 2019-11-25 18:00:00

남포석 벼루
남포석 벼루

예부터 벼루를 종이․붓․먹과 더불어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하였다. 이 네 가지는 각기 용도가 다르면서도,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서로의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그로 해서 '글방의 네 벗'이라고 일컬어 왔다. 글 쓰는 선비들에게 이들 네 벗이야 말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으며, 항상 곁에 두고 애장해 온 물건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벼루는 수명이 길어 오래도록 그 용도와 멋을 다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 가운데서도 단연 최상품으로 꼽혔다. 또한 대를 이어 가보로 물림으로써 그 집안의 학풍을 말해주는 훌륭한 징표이기도 하였다.

벼루의 기원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대략 2천년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의 한나라 천자가 옥으로 만든 벼루를 사용하였으며, 태자에게 칠연(漆硯)을 하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벼루로는 낙랑고분 유적에서 출토된 정방형의 점판암 벼루가 있다. 또한 삼국시대의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형다각도연(圓形多脚陶硯)과 단국대박물관에 있는 원거사각도연(圓渠四脚陶硯)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신라의 벼루는 대부분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벼루가 만들어졌다. 뼈로 만든 휴대용 벼루인 골연(骨硯), 상아로 만든 장식용 벼루인 상아연(象牙硯), 기왓장 특히 수막새의 등을 평평하게 만든 와연(瓦硯), 궁전이나 사원의 바닥에 깔았던 네모난 와전(瓦塼)으로 만든 전연(塼硯), 진흙을 물에 씻어 찌꺼기가 가라앉은 다음 위에 뜨는 앙금을 이용하여 만든 징니연(澄泥硯), 나무로 만든 목연9木硯), 나무로 벼루의 형태를 만든 뒤 석분이나 토분을 옻에 혼합해서 발라 만든 칠연(漆硯), 그리고 먹이 필요 없이 아무것이나 물을 붓고 갈면 먹물이 되는 묵연(墨硯) 등이 있다.

벼루의 먹을 가는 부분을 연당(硯塘)이라 하고, 먹물이 모이는 오목한 부분을 연지(硯池)라 한다. 벼루를 만드는 돌은 너무 딱딱해도 너무 물렁해도 안 된다. 단단하면 먹이 잘 갈리지 않고, 무르면 먹을 갈 때 벼루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좋은 벼룻돌을 캐내기가 쉽지 않다. 또한 벼룻돌은 조각할 수 있는 돌이어야 하는데, 이는 산의 겉돌과 달리 갱 속에서 세밀한 입자 형성이 된 속돌을 말한다. 청회석(靑灰石)은 그 같은 점을 고루 갖춰 벼룻돌로는 최상품으로 꼽힌다.

벼룻돌은 청석(靑石)을 제일로 손꼽는다. 중국에서는 광동성 지방에서 생산되는 단계석(端溪石)이 유명하고, 우리나라에서는 평북의 위원석(渭原石)과 충남의 남포석(藍浦石)이 대표적인 벼룻돌로 꼽히는데, 멀리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생전에 "남포벼루 3개를 구멍 냈다."고 자랑한 일화가 있다. 그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면 남포연(藍浦硯)의 진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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