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광장의 우상(?)'-내 뺨을 쳐라

입력 2019-10-24 19:04:28 수정 2019-10-24 20:14:01

임상준 경북부 차장
임상준 경북부 차장

10년 살이도 못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억울하게 옆 동네 어른에게 뺨을 한 대 맞은 기억이 있다. 친구와 우리끼리 쓰던 '비속어'가 지나던 그에게 욕으로 들렸나 보다. 대뜸 뺨을 때렸다.

갑작스러운 린치(?)에 혀가 굳었다. 한참 만에 울먹이며 말했다. "당신한테 한 말 아니에요." 인기 있던 TV 드라마에서 여배우가 '당신'이란 대사를 치는 걸 본 터다. 꼬마의 기질(?)은 '따귀 한 대 더'로 되돌아왔다. 당신 호칭을 '버릇 없는 아이'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보통 시골에선 안면 있는 어른이면 다 '아재'라 불렀다. 워낙 좁은 공동체다 보니 낯선 어른은 만날 기회가 잘 없었다. 자연히 '아재'가 아닌 인물의 호칭은 갸웃거리게 된다. 3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당신'이란 단어의 흉터는 기억 저편에 똬리를 틀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취임 35일 만인 지난 14일 전격 사퇴했다. 하지만 여전히 조국 사태(?)는 진행형이다. 특히 부인인 정경심 교수가 24일 구속되면서 '조국의 시간'은 더욱 재촉되고 있다.

야당은 일찌감치 조국 전 장관을 법무부 장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보수도 그와 가족을 둘러싸고 까도까도 나오는 의혹에 '조국=비리의 아이콘'으로 동일시했다. 반면 여당과 진보 진영은 조국을 검찰 개혁의 적임자로 해석했고 서초동에 모였다.

결론적으로, 한 인간의 잣대인 것을 자꾸 좌우 진영 논리로 풀어내려고 하니 해법이 있을 수 없다. '조국'이란 본질과 언어는 같지만 진영 프리즘에만 투영하면 동전 양면으로 나온다.

어제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가 오늘은 원수처럼 비난하는 일이 일상이 돼 버렸다. 이런 편 가르기 이분법은 광화문(보수)과 서초동(진보)으로 대변되는 '광장 정치'도 양산했다.

장관 사퇴 20분 만에 팩스로 '서울대 복직 신청서'를 낸 것이나 한 이불 덮고 자는 부인이 한 일을 몰랐다고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3곳의 법무법인에서 18명의 호화 변호인단을 꾸린 것도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 무죄추정의 원칙의 그늘 아래 있다. 다만 일반 국민 정서에는 한참 못 미친다. 입만 떼면 정의와 공정을 외쳐왔던 조 전 장관이라 더더욱 그렇다.

법으로 맞다고 공정하고 정의롭다고 할 수는 없다. 조국 가족이 공정, 정의가 앞으로 법에만 어긋나지 않으면 된다는 쪼그라진 인식을 심어줬다고 하면 과장일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특정 단어에 가슴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조국'(祖國)이다. 어머니와 비슷하다. 위기 때마다 '조국'은 나라를 구했다. 6·25전쟁에서는 순열의 피로 강산을 지켜냈고, IMF(국제금융위기) 때는 금 모으기 운동으로 국가적 고비를 넘게 했다. 하지만 비리 의혹으로 점철되는 조(曺)국 사태를 보면서 가슴 저렸던 '조국'은 이제 진영 논리부터 떠올리는 상징이 됐다. '조국 수호 vs 파면'이란 중의적 의미에 대입돼 가슴 벅찼던 '대한민국'(조국)의 의미가 퇴색됐다.

영국 철학자 베이컨은 시장의 우상을 경계했다. 사람들 간의 교류는 언어를 통해 나타나는 탓에 말에 의한 오류가 사실을 간과한다고 봤다. 특히 언어가 혼재된 시장에서는 같은 말조차 다른 의미로 전달돼 심각한 소통의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해석했다.

공정과 정의, 선조들이 일군 자랑스러운 조국(祖國)까지…. 조국 가족의 잘못은 무죄추정의 보호막을 벗어났다. 특정 광장에 모인 그들만의 우상이 지켜줄 지는 모르겠다. 요즈음 조국이라 한다면…. 기꺼이 내 뺨을 내놓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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