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정황(1735~?) '대구달성'

입력 2019-10-27 06:30:00

이인숙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담채, 49×69㎝,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종이에 담채, 49×69㎝,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진경산수는 우리 땅, 우리 산하(山河)를 그린 그림이다. 그 중에서도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을 그린 그림에 관심과 애착이 더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대구를 그린 조선시대 그림은 '대구달성(大丘達城)'이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겸재 선생의 손자인 손암(巽庵) 정황의 그림이다.

화면의 한 가운데 위쪽으로 석성(石城)인 대구읍성을 그렸고, 그 아래로 『삼국사기』에서부터 나오는 대구의 유서 깊은 지명을 간직하고 있는 높직한 토성(土城) 달성을 나무들이 무성한 둥근 모양으로 그렸다. 달성 오른쪽 아래에 읍성을 손짓하며 내려다보는 두 명의 인물과 동자 한 명이 있다. 겸재 선생이 즐겨 그리던 점경인물이다. 금호강이 화면 바깥쪽으로 둥그렇게 대구 분지를 감싸고 있는데 왼쪽 위의 산 사이에서 흘러 내려 금호강과 합류하는 물길은 신천, 그 아래 정자가 있는 작은 산은 침산일 것이다. 성근 필치지만 읍성과 달성, 금호강과 신천 등이 18세기 후반 도시 경관으로 관망되는 대구의 특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가퀴가 그려진 성벽 안팎으로 지붕이 빼곡해 감영도시의 번화함이 잘 나타난다. 붉은 색 기둥의 큰 건물이 몇 채 보이는데, 경상도 관찰사가 근무했던 경상감영 정청(政廳) 선화당과 성문 위에 세워진 누각인 문루(門樓)이다. 위쪽의 2층 건물은 읍성의 남문인 영남제일관이고, 아래쪽 아치형 성문 위의 누각은 달서문을 그린 것일 것이다. 동쪽에는 진동문, 북쪽에는 공북문이 있었다. 1736년(영조 12년) 대구읍성을 석성으로 쌓은 후 이 사실을 기록한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의하면 4대문 외에 2개의 소문(小門)이 있어 성문이 6개였고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망경루 등 4개의 망루가 있었다. 감영도시의 위용을 뽐낼만한 읍성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에 그려진 대구읍성이 모조리 파괴되어 사라진 것은 1906~07년으로 경상도관찰사서리이자 대구군수인 친일파 박중양(1872~1959)에 의해서였다. 대구읍성이 있었다는 흔적은 성벽이 헐리면서 동서남북에 생긴 동성로(東城路),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등 길 이름뿐이다. '달성토성', '경상감영', '대구읍성'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왔던 도시 대구의 역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문화적 유전자이다.

할아버지의 진경산수화를 이은 정황이 언제 어떻게 대구를 그리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정조 시대 의관(醫官)으로 대수장가였던 석농(石農) 김광국(1727-1797)은 "정황은 바로 겸재의 손자로 그의 그림은 할아버지에 비하면 소발자국에 고인 물을 강이나 바다와 비교하는 것 같으므로 화가 집안의 전통을 그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조부의 전통을 이은 것이 귀하므로 한 폭을 거두어 소장하였다."라고 했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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