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뒷담(後談)] 세탁소의 진화와 '컴퓨터크리닝'

입력 2019-10-16 18:00:00

평소 다닐 때 지나쳤던 으슥한 길로 괜히 발길을 향하면, 늘 걷던 속도보다 조금 느리게 걸으면, 고개를 좀 들어 담벼락 위나 지붕 따위를 또 허리를 좀 숙여 땅바닥의 생김새를 살피면, 대구의 골목길이 감춰 둔 이런저런 이야기가 발견됩니다. 온라인에만 게재하던 골목뒷담을 지면에도 4주에 한번씩 연재합니다.

1980년대 들어 세탁 업계에 도입된
1980년대 들어 세탁 업계에 도입된 '전자동 세탁', 즉 '컴퓨터크리닝'은 업계에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최고'라는 수식을 붙일만했다. 황희진 기자
간판에서
간판에서 '컴퓨터'를 강조한 대백컴퓨터드라이크리닝. 크리닝은 컴퓨터크리닝은 물론 드라이크리닝의 준말이기도 하다. 황희진 기자

골목길 대표 업종 '슈퍼'에 버금가는 업종이 있습니다. 바로 '세탁소'입니다.

그간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슈퍼는 처음에는 '구멍가게' '점빵' '상회' 등으로 불리다가 '슈퍼마켓'이라거나 '마트'로 불리더니 요즘은 주변에 '대형마트'와 '편의점'이 생기면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입니다. 물론 편의점으로 옷을 갈아입은 슈퍼가 꽤 됩니다.

세탁소는 어떨까요. 구한말 내지는 일제강점기쯤부터 줄곧 '무슨무슨 세탁' 또는 '무슨무슨 사(社)'라는 간판을 달아 온 업종인 세탁소는 1980년대 들어 느닷없이 '컴퓨터크리닝'이라는 단어를 너도나도 간판에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세탁'을 가리키는 클리닝(cleaning)의 옛날 표기인 크리닝 앞에 컴퓨터를 붙였으니, 컴퓨터 세탁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뭘까요.

전자동 세탁기가 198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무슨무슨 컴퓨터크리닝'이라는 세탁소 이름이 급속히 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수동 내지는 반자동 세탁기(워셔기)가 쓰였는데, 버튼을 눌러 세탁을 자동 제어할 수 있는, 일종의 컴퓨터 회로가 탑재된 세탁기가 보급되면서 업계에서는 일대 혁명으로 인식했던 셈입니다.

1984년 신문들을 살펴봐도 '세탁업소의 컴퓨터 시대 선언'이라는 광고가 등장합니다. '88올림픽도 있고 국민 위생 문제도 있고하니'라며 세탁소 업주들에게 자기네 회사 전자동 세탁기를 설치하라고 홍보하는 내용입니다.

온갖 전자동으로 가득한 스마트폰에도 컴퓨터라는 수식을 붙이지 않는 요즘이라면, 그냥 전자동 세탁기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세탁의 자동화에 대해서는 컴퓨터 말고는 실감나게 표현할 단어가 없었던 셈입니다. 세탁소 주인들도, 소비자들도, 그리고 광고에서도 그렇게 공유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1991년 11월 27일 한겨레신문 '컴퓨터 만능 환자들'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는 "우리나라에 컴퓨터 바람이 불면서 심지어는 세탁소에도 컴퓨터 세탁이라고 써 붙여야 장사가 되는 세상이 됐다"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이어 세탁소 업계는 또 한번 변화했습니다. 1990년대 들어 세탁기 없이 기존처럼 수거·배달만 해 세탁공장에 맡기고, 대신 가격을 낮춘 세탁편의점이 등장했습니다. 이어 요즘은 세탁소 프랜차이즈가 여럿 등장해 있습니다.

또한 1990년대를 시작으로 대학가 등 젊은층 1인 가구가 많이 사는 지역과 맞벌이 부부가 많은 새 아파트 단지 등에는 물빨래만 가능한 빨래방이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늘어나던 빨래방은 대학가 원룸마다 드럼세탁기가 기본으로 설치되는 등 세탁기의 대중화로 사양길을 걷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소형 드럼세탁기로는 소화할 수 없는 이불 세탁이 가능한 점, 아직은 보급이 저조한 건조기를 대용량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점 등을 소비자들에게 내세우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즉, 요즘 세탁소 업계는 소비자들의 삶의 변화에 따른 요구사항을 끊임없이 포착하면서 이런저런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어 전자동 세탁기 같은 어떤 혁신적 세탁 기술이 등장한다면, 세탁소 간판은 또 한 번 업데이트 붐을 겪을지 모르겠습니다. 컴퓨터크리닝 정도의 센세이션은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요.

관련 흔적들을 사진으로 간추렸습니다. 사라진 가게도 있습니다.

※이 게시물은 골목폰트연구소(www.facebook.com/golmokfont)의 도움을 얻어 작성했습니다.

소비자가 직접 세탁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가 직접 세탁 서비스를 이용하는 '빨래방'을 설명할 때 '셀프'라는 단어도 종종 쓰였다. 1990년대는 세탁소 말고도 여러 업종에 '셀프 서비스' 붐이 불기 시작한 시기이다. 황희진 기자
물론
물론 '컴퓨터크리닝'이라는 단어 말고 '세탁'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써 온 세탁소도 많다. 황희진 기자
반석크리닝, 반석세탁.
반석크리닝, 반석세탁. '크리닝'과 '세탁'을 간판에 함께 표기한 사례. 황희진 기자
'컴퓨터크리닝'도 '세탁소'도 아닌 '빨래터'라는, 우리네 세탁 생활의 원류를 그대로 간판에 드러낸 사례도 있다. 세탁소를 순우리말로 바꾸면 빨래터가 맞다. 황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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