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수 있어 행복" 포항열린학교 어르신 한글 교육

입력 2019-10-08 18:12:13 수정 2019-10-08 20:26:53

야학(夜學) 경북 포항열린학교 비문해 초급반 어르신들 배우는 재미에 '푸~욱'
2017년 기준 경북 한글 모르는 인구 44만명(인구 21%)

7일 오후 포항열린학교에서
7일 오후 포항열린학교에서 "내가 까막눈인거 자식들은 몰라"하며 손 사진만을 겨우 허락한 할머니. 손녀 동화책 읽어줄 상상에 한글 배우기를 게을리 할 수 없다고 했다. 배형욱 기자

"천원짜리 아홉 장을 어떻게 읽고 써야 할까요?"

7일 오후 7시 30분쯤 경북 포항 북구 죽도동 포항열린학교 한 교실에서 교사가 학생 7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구백원!" 한 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자 "아니다. 선생님, 천원이 아홉 개니까 일, 십, 백, 천. 구천원으로 읽는 게 맞죠?"라고 다른 학생이 말했다. 주변 학생들도 "맞다, 맞다"며 맞장구쳤다.

교사는 "시장에서 돈을 주고 거스름돈을 받는 걸로 생각하시면 쉬워요. 여태껏 해오셨던 건데, 막상 숫자를 한글로 읽으려고 하니 어려우신 거예요"라고 말하며 다시 숫자를 읽는 수업을 이어갔다.

포항열린학교는 주로 포항지역 비문해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야학(夜學)으로, 간혹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청소년이나 외국인들이 오는 경우도 있다.

이날 수업이 진행된 비문해 초급반에는 학생으로 등록한 어르신 9명 중 2명이 결석해 7명이 수업을 받았다. 교과서는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발간한 성인문해 초등과정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한글 공부로 넘어가 볼게요. 단어를 같이 읽은 다음에 받아쓰기를 할 거예요."

학생들은 거친 손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겼다. 단어를 모두 읽고 나니 교사는 책을 덮고, 공책을 펴게 했다.

연필을 손에 쥔 학생들은 바짝 긴장하며 교사의 입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교사는 '밥물, 십리, 집는다, 닫는다, 걷는다, 국물' 등 10개 단어를 큰 소리로 말했다. 교사가 이렇게 크게 말하는 건 학생 중 한 명의 나이가 80세가 넘어 귀가 어두워져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교사는 긴장한 학생들에게 "오늘 5개 틀려도 내일 4개 틀리면 되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라며 다독였다.

문제가 다 나가고 교사가 점수를 채점하는 시간이 되자 교실 분위기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100점을 맞아 칭찬을 받는 학생이 나오자 박수와 부러운 눈빛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번 시험에서 학생 대부분 만점을 받았다. 1~3년에 걸쳐 부단히 한글을 깨치려 노력한 결과였다. 수업 교재는 초급 마지막 과정인 네 번째 책이어서, 학생들은 이 책만 떼면 중급과정으로 넘어간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1년이라도 다녔던 학생은 보통 초급반 상급반인 중급반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곳 초급반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기초 교육 혜택조차 받지 못했던 이들이 수업을 받는다.

열린학교는 '초급, 중급, 고급반'이 있으며 고급반을 끝내면, 초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할 만한 실력을 쌓게 된다.

김점례(가명) 할머니는 "답답하고 아쉬워서, 내 이름이라도 쓰고 싶어 한글을 배우려고 야학에 들어왔다"며 "아직 은행, 동사무소에 가는 게 좀 두렵긴 해도 대충은 읽을 수 있어 너무 즐겁고 좋다"라고 했다.

윤정애(가명) 할머니는 "건강만 뒷받침되면 배울 수 있는 만큼 다 배우고 싶다. 남들 앞에서 멋지게 글자를 슥슥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면서 못 배운 설움에 주눅 들었던 세월을 보상받고 싶다"라고 말했다.

"사진은 왜 찍어요. 한글을 모르는 게 부끄러워 숨기고 살았는데, 얼굴이 나오면 야학에 다닌다는 걸 사람들이 다 알게 되잖아요. 여하튼 사진은 안 돼요."

사진을 찍으려는 기자에게 학생들은 손사래를 쳤다.

교사는 "가족 몰래 글을 배우러 오는 분이 많다. 얼굴이 알려지는 것이 당연히 싫을 것"이라며 학생들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2017년 기준으로 경북에는 인구의 21.1%인 44만7천명이, 포항에만 인구의 14%인 5만6천명이 한글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하염열 열린학교 교장은 "한글을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워 말도 못 하고 속앓이를 하는 분들이 아직 주변에 많다"며 "경북도와 포항시도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우리처럼 자원봉사자로 뭉친 야학도 있으니 걱정 말고 배움을 시작하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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