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의 근대문학을 읽다] 한국 최초의 탐정소설전집

입력 2019-09-21 06:30:00

정혜영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1940년 조광사에서 출판된 세계걸작탐정소설전집 제 1권(여시제 소장)
1940년 조광사에서 출판된 세계걸작탐정소설전집 제 1권(여시제 소장)

중학교 때 친구 중에 탐정소설 마니아가 있었다. '여학생'이라든가, '학원'같은 잡지가 인기를 끌고, 청소년 연애소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그 친구는 코난 도일에서부터, 아가사 크리스티, 앨러리 퀸의 탐정소설을 탐독하고 있었다. 몇 몇 주변 친구들이 호기심에 그 친구에게 탐정소설을 빌리곤 했지만 대부분 몇 페이지도 채 읽지 못하고 곧장 돌려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탐정소설에는 여학생 취향의 낭만적 연애이야기가 없었다. 연애담은커녕, 책장을 여는 순간 잔혹한 시체가 눈앞에 툭 떨어졌다.

문제는 이 뿐이 아니었다. 실마리를 따라서 범인을 찾아가는 탐정소설 추리 과정은 중학생에게는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다. 달콤한 연애소설에 젖어 있던 아이들로서는 당연히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탐정소설과 관련한 취향에 관해서는 일제강점기 조선 대중도 1970년대 한국 여중생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던 듯하다. 일제강점기 조선대중은 연애소설 혹은 귀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나오는 야담류에 빠져있었다. 연애의 달콤한 묘미도, 귀신이 불러일으키는 공포도 없이 과학적 지식으로 가득 차있는 탐정소설은 조선 대중들에게는 낯선 세계였다.

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동안 서구 탐정소설은 번역 과정에서 조선 대중의 입맛에 맞게 모습을 바꿔서 소개되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한 편의 야담을 읽는 기분으로 탐정소설을 읽었다. 그런 조선에서 원작 내용을 그대로 번역한 탐정소설, 그것도 전집발간은 그 자체로서 혁명적 시도였다. 조광사에서 기획한 '세계걸작탐정소설전집'(1940)이 바로 그것이다. 전집이라고는 하지만 총 세 권. 어찌 보면 전집이라는 이름을 내걸기도 부끄러운 분량이었다. 수록 작품은 코난 도일, 모리스 르블랑, 에밀 가브리오, 이든 필포츠, 그리고 프레드릭 아놀드 쿠머의 대표 탐정소설 5편이었다.

일본과 비교하면 참으로 초라한 결과였다. 일본에서는 이미 1929년, 유명 출판사 세 곳에서 제 각각 수 십 권에 달하는 세계유명탐정소설전집에, 코난 도일 전집, 모리스 르블랑 전집까지 발간된 상황이었다. 그 때문일까.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달랑 세 권에 불과했던 이 전집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분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 권 밖에 되지 않는 '세계걸작탐정소설전집'이었지만 그 발간에는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했던 조선 문학가들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들 문학가들은 탐정소설의 과학적 지식이 조선사회를 덮고 있던 미신과 초자연적 의식을 말끔하게 제거해주기를 바랬다. 그래서 조선이 오랜 어둠을 벗어던지고 일제를 이길 수 있는 강인한 힘을 가지게 되기를 희망했다. 일본탐정소설전집 발간을 뒷받침해주었던 일본 제국의 거대 자본과 문화적 지원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탐정소설 전집 발간을 향한 대중의 열렬한 호응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세계걸작탐정소설전집'은 척박한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조선의 미래를 꿈 꾼 몇 몇 문학가들이 만들어 낸 열정의 결과였다. 대구대학교 인문교양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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