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이 지나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아침에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가을 하면 어렸을 적 운동회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국민(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빠지지 않은 종목은 달리기였다. 전교생이 모두 참가하는 100m 경기와 학년별 대표가 참가하는 계주 경기가 있었다. 100m 경기는 한 조에 8명 정도가 달려 결승점을 통과하면 1등에서 3등까지는 손목에 도장을 찍어주고 등수에 따라 학용품을 상품으로 나누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상품을 받은 아이와 받지 않은 아이 간에 미묘한 우월감과 패배감이 감돌았던 기억이 있다.
잠깐 달리기 경기에 대한 가상적 상황을 가정해 보자. 100m 경주가 열리는데 참가자가 20대 청년, 50대 중년, 70대 노인, 청각장애인이라고 한다면, 이 경기의 결과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경기를 진행하기도 전에 등수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참가자나 관람객 모두 경기가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고 불평할 것이다. 그래서 실제 경기에서는 연령을 구분하고, 성별을 구분하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여 비슷한 조건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참가자 간의 경쟁에 따라 우열을 가린다. 적어도 이 경기에서는 앞의 경기와 비교하여 과정에 대해서는 불공정성을 얘기하진 못한다.
과정의 공정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기 위해 20대만 참가하는 100m 경기를 진행한다고 해보자. 그런데 운동장의 트랙이 8명만 달릴 수 있어 100m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숫자가 제한되고 1, 2명에게만 거액의 상금이 주어지고 다른 참가자에게는 주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예선전도 서울이나 일부 지역에서만 열리고, 그 예선전을 통과한 참가자에게만 결선에서 달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경기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에서부터 경쟁의 과정, 그리고 경쟁이라는 형식은 갖추었지만 경쟁의 결과에 따른 상금의 배분 등 모든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이 100m 경기를 대학입시나 취업이라고 생각해보자. 결승전에 올라가는 것은 명문대와 고액 연봉의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 경쟁에 참가하는 것으로, 거액의 상금은 입학과 입사라고 생각해보자. 경기에 아예 참가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이나 경쟁에 참가했다 해도 등수에 들지 못한 참가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조국(曺國)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두고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조국 대전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모든 이슈를 법무부 장관이 삼켜버리고 중요한 사회적 이슈는 공론장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여야와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으로 정국은 안갯속이다. 이번 조국 사태를 두고 다양한 관점으로 설명한다. 다음 선거를 앞두고 진보와 보수의 진영전으로도, 기득권이 된 86세대의 정체성 상실로도, 검찰 개혁을 둘러싼 검찰과 현 정부의 힘겨루기로도 해석한다.
필자의 눈에는 '평등, 공정과 정의'라는 단어로 조국 사태가 읽힌다. 많은 논란 중에서도 자녀의 입시를 둘러싼 논란, 사모펀드를 통한 재산 증식 과정에 대한 논란은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롭게'라는 문재인 정부의 슬로건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현 정부를 대표하는 강력한 상징성을 가진 인물의 가족사가 법적 심판까지 가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불가피하다. 다수의 사람들이 경쟁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경쟁에 참가할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고, 경쟁의 과정이 공정하고, 결과를 결정하는 요인이 개인의 실적이나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번 조국 사태는 그런 믿음이 좌든 우든, 민주화 세력이든 산업화 세력이든 상층 엘리트들에게는 그저 정치적 구호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달리기를 잘 하지 못했던 나는 운동회에서 항상 4, 5등이었다. 각종 경기에서 상품을 많이 받았던 한 친구가 쓱 건네주는 노트 한 권에 기분이 좋아졌던 그 시절, 그 친구가 선선한 가을바람에 문득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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