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문화의 고장 성주
〈2〉 세종대왕자 태실 이야기
세종은 자식 복이 많은 임금이었다. 소헌왕후와의 사이에 10명(8남2녀)의 자식을 두었고, 후궁 소생까지 포함하면 모두 19남4녀를 생산했다. 훗날 계유정난과 같은 불행한 일도 있었지만 분명 세종은 아버지 태종(12남17녀)과 더불어 많은 자식을 낳아 조선의 사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크게 이바지한 임금이었다.
시경(詩經) 대아편에 '대종유한(大宗維翰) 종자유성(宗子維城)'이라고 했다. 왕실은 국가의 큰 줄기이고, 왕실 자손은 성(城)이라는 말이다. 풀어보면 왕실 자손이 크게 번성하는 것은 결국 종사(宗社)를 든든히 지키는 울타리나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세종은 성군이라는 역사적 평가와 함께 막 창업한 조선왕조의 수성(守城)이라는 측면에서 자기 몫을 다한 복된 군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일읍입태지(一邑卄胎地) 성주
왕실의 번성에 있어 많은 자손은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은 아니다. 왕의 혈통을 이은 자손들이 하나같이 영민하고 출중한 인재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종자(宗子)로서의 의미가 반감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태어날 때부터 지체에 걸맞는 격식 있는 교육과 관리가 뒤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 출발점이 왕손의 무병장수 등 발복을 기원하는 절차 곧 '장태'(藏胎)다. 신분에 상관없이 자식의 태를 묻거나 정결하게 태우는 것이 우리의 전통 관습이었지만 왕실의 장태는 국가 차원의 의식으로 발전했고 조선은 그 정점에 있다.
조선 초에는 임금의 태실만 조성했다. 태조와 정종, 태종, 세종의 태실이 전국의 길지에 들어섰다. 왕위에 오르면 가봉(加封) 태실로 격을 더 높였다. 하지만 세종은 맏아들 문종의 태실을 예천 상리면 명봉사 북쪽 태봉에 마련했다. 왕자 태실의 효시다. 이어 진양(수양)대군 등 18명의 아들과 원손 단종의 태실을 성주 선석산 태봉에 모아 조성했다.
자식의 태를 길지에 묻는 것은 그들의 운명뿐 아니라 장차 국운을 좌우할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성주 월항면 태봉이 삼망(三望·3배수 후보지)에 들고 최종 낙점된 것도 이 같은 왕실 장태의 중요성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왜 하필이면 성주에 왕자 태실을 조성했을까. 그 첫 번째 가능성은 아버지 태종과의 연관성이다. 성주 용암면 대봉리 조곡산에 조성된 태종 태실의 선례를 보면서 자연스레 성주가 직계의 태실지로서 둘도 없는 곳이라는 친연성이 작용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태실을 조성함으로써 왕실과 백성간의 유대감이나 소통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일각에서는 지방 호족을 견제하는 의도라는 해석도 있다. 어떻든 전국 320여 곳에 조선 왕실의 태실을 조성한 것은 여러 요소가 복합된 결과다.
특기할 것은 조선조 역대 임금 22명의 태실 가운데 7곳이 경북에 조성된 점, 성주가 조선 왕실 태실지 가운데 규모가 제일 크고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는 세종대왕자 태실의 역사적·문화사적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자식의 태를 한꺼번에 모아 조성한 임금도 세종이 유일하다.
주세붕의 말처럼 '일읍오태지'(一邑五胎地)의 명당인 소백산도 그렇지만 '일읍입태지'(一邑卄胎地), 즉 태종과 단종, 세조를 비롯한 20기의 태실이 입지한 길지 중의 길지인 성주는 조선왕조 태실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세종대왕자 태실이 국가지정 사적 제444호(2003년 지정)로 잘 보존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자식의 장태에 각별한 염원을 담은 세종의 뜻이 그만큼 깊고 진중한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최대 규모의 군집, 성주 태실
조선 중종때 을사사화로 인해 성주로 유배온 묵재(黙齋) 이문건이 1551년부터 16년간 쓴 육아일기 '양아록'(養兒錄)을 보면 손자 숙길의 탯줄을 선석산에 묻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선석산은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는 태봉(胎封)을 감싸안은 주산이다. 이 곳에는 태실 수호사찰인 천년고찰 선석사(禪石寺)가 자리하고 있다. 조광조의 제자이자 유명한 문신인 이문건이 선석산에 손자의 태를 묻은 것은 결국 최고 명당이자 길지인 태봉의 좋은 기운을 받을 요량이었을 것이다.
1438년(세종 20년)부터 1442년까지 4년 8개월에 걸쳐 조성된 세종대왕자 태실은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모두 19기의 태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태실 배치 등을 볼 때 계획에 따라 순차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조성 당시 세운 석물이 온전한 모습으로 남은 것은 모두 14기다. 안평대군·금성대군 등 다섯 왕자의 태실은 파괴돼 기단석만 남은 상태다.
이 가운데 세손 단종의 태실은 문종이 즉위한 뒤 성주 가천면 법림산에 따로 조성했다. 태항아리만 옮겨가고 남은 석물은 땅속에 묻었다가 1977년 성주군이 세종대왕자 태실을 복원하면서 수습해 다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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