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벨파스트 평화의 벽

입력 2019-09-02 10:53:34 수정 2019-09-02 19:09:07

아일랜드 통합파-영국령 선택파
서로를 분리하기 위한 높은 장벽
북아일랜드 도시 여러 곳에 설치
벽 세우기 아닌 허무는 것이 평화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교수
조수정 대구가톨릭대 교수

북아일랜드의 도시 벨파스트(Belfast)에는 '평화의 벽'(Peace Walls)이 있다. 벨파스트의 여러 곳에 설치된 이 벽들은 크기가 다양한데, 몇백m에 불과한 짧은 것이 있는가 하면 5㎞에 달하는 매우 긴 것도 있다. '평화의 벽'이라는 이름 대신 종종 '평화선'(Peace Lines)이라 불리기도 하며 모양도 여러 가지여서, 아무도 넘어갈 수 없는 높고 튼튼한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철책을 둘러치거나 또 어떤 곳은 도로표시만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밋밋한 벽도 있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벽화가 많고, 몇 해 전에는 영국의 유명한 그라피티 미술가 뱅크시(Banksy)가 이곳에 그림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근래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차츰 늘어나자 택시 관광(Taxi Tour)이라는 것이 생겨났는데, 어떤 여행객은 평화의 벽에 자신의 메시지와 서명을 남겨 놓고 가기도 한다.

그런데 벽과 평화라는 두 단어는 서로 어울리기나 한 것일까? 가만 생각해보면, 벽이라는 단어에는 분리, 단절, 고립, 방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조화, 연결, 소통, 일치를 속성으로 하는 평화와 연결되는지 의아해진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기묘하게 조합된 이 구조물은 대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

벨파스트가 속해 있는 북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와 함께 영연방을 이루는 영국 영토이다. 아일랜드(에이레)와 같은 섬에 있으면서도 별개의 나라가 된 것은, 수백 년 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 북아일랜드 지역은 영국령으로 남아 있기를 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생겨났다. 북아일랜드에는 아일랜드와 통합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영국 정부에 그대로 소속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었는데, 이 상황은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심각한 폭력사태로 치달았다. 특히 벨파스트에서는 1980, 90년대의 유혈 투쟁으로 무고한 많은 시민이 희생되었고, 억울함과 적개심,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되자, 서로를 분리하기 위한 장벽이 도시 곳곳에 세워졌다. 그들의 상반된 주장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그 뿌리가 중세에까지 닿아 있는 오랜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일랜드인과 영국인, 구교도와 신교도, 공화파와 왕당파, 독립파와 통합파, 민족주의자와 연합주의자로 그들은 서로를 분리하고 배척했다. 1998년의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이른바 성금요일 평화협정 체결로 벨파스트의 무장투쟁은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영국의 브렉시트 결과가 북아일랜드에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아닐지 우려스럽다.

시민들 간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벨파스트 곳곳에 세워졌던 벽은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버티고 있다.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여행의 즐거움 대신 역사의 무거운 메시지를 전해준다.

시야를 조금 넓혀 보면, 평화의 벽이 북아일랜드에만 세워진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평화를 빙자한 벽 세우기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화의 시대를 사는 것일까? 정치적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빈부의 갈등, 남성과 여성의 갈등, 북한과의 갈등, 이웃한 나라들과의 갈등. 매일 쏟아지는 갈등 뉴스의 홍수 속에서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와 너를 가르는 정체성의 기준은 참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이 기준들이 서로를 적대시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는 것이 평화다. 높은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 위해 마주 앉는 것이 평화다. 대화를 통해 협조하고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 잘잘못을 따지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것보다, 인내와 오랜 기다림으로 대화를 맞이하는 것이 훨씬 인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평화가 찾아들어, 갈등으로 쌓아 올린 높은 벽들이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변모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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