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를 세로로 길게 잘라 양 끝을 책 위에 걸치고 중간에 동전을 한 개 올려본다. 종이가 동전의 무게를 못 버티고 무너져버린다. 이번엔 종이 양 옆을 조금 접어 올려 동전을 올려본다. 종이가 동전 하나를 버텨낸다. 종이 아래 다른 종이를 말아 넣고, 부채처럼 접은 종이를 책 위에 걸쳐본다.
'와우!' 동전이 많이 올라가고 있었다. 종이와 동전으로 무너지지 않는 다리의 비밀을 알아내는 실험은 '생활과학교실' 콘텐츠 개발을 위한 것이다.
숨 돌릴 겨를 없이 바빴던 여름이 지나갔다. 휴가도 미룬 채 분주했던 이유는 9월부터 시작하는 생활과학교실 하반기 프로그램 개발 때문이다. 생활과학교실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필자가 근무하는 과학관에서 운영하는 '찾아가는 과학교실 사업'이다.
과학교실 운영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은 주로 강사들 몫이지만 그것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은 온전히 필자 몫으로 자처하고 있다. 프로그램은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질을 높여간다. 학생들이 호기심을 갖고 탐구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과학 원리를 습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누구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데 굳이 안 해도 될 고생을 왜 사서 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매 학기 수고를 자청하며 힘들어도 적당히 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는 이 일이 은근히 즐겁기 때문이다. 과학관에서 근무하기 전 생활과학교실 콘텐츠 개발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필자에게는 과학이론을 실험을 통해 알려 주는 수업이 멋진 신세계였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과 과학으로 즐겁게 소통할 수 있을 지 밤새 고민하며 그것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던 어느 날 민재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청년이 되었을 그 아이는 수업 시작 전 항상 교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에 든 짐을 들어주었다.
부모님이 시장에서 통닭집을 한다는 아이의 꿈은 요리사였다. 과학교실에 참여한 후로 과학자가 될까 생각 중이라던 민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프로그램 개발을 대충 넘어갈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다.
올여름 무더위와 동행한 또 하나가 있다. 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독법 강의'란 책이다. 책은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생뚱맞은 선택이었지만 덕분에 무일(無逸)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무일의 사전적 의미는 게으름을 피우지 않음, 안일하지 않음, 편하게 놀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책에는 군자가 편안함을 취하기에 앞서 노동의 어려움을 아는 무일에 처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군주의 도리를 설명한 서경 주공 편에 나오는 글로, 저자는 무일 편을 능력 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현대인의 가치관을 경계하는 경구로 읽으라 했다. 어디서든 책임지는 자리는 편하게 누리는 위치가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고 깨어있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자리라야 된다는 의미일 듯싶다.
과학은 일상의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손으로 조작해보고, 탐구하면 누구나 흥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이다. 과학이 우리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이치를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는 거란 걸 함께 나누고 싶은 게 한여름 무일한 가장 큰 이유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다리 중 하나인 금문교가 놓여 있는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해협은 넓은 거리, 깊은 수심, 강한 해류, 짙은 안개 같은 요인으로 다리를 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지역이었다. 다리는 적당한 지점에 높은 탑을 세우고 강철 줄로 상판을 연결해 들어 올리는 현수교 방식으로 건설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놓았다.
무너지지 않는 다리의 비밀은 획일화된 구조가 아니라 상황에 가장 알맞은 형태로 변형하여 다리를 놓는 것이다. 양옆을 세우거나, 아치구조로 받치거나, 트러스구조를 덧대거나, 줄로 당기거나 해야 한쪽으로 쏠리는 무게의 압력을 분산할 수 있다. 다리는 혼자서 갈 수 없는 곳을 스스로 건너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교육에 비할 만하다. 과학 교육 또한 지식 전달 위주의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을 통해 이루어져야 과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치열하게 보낸 여름의 끝. 그 끝의 시작은 어디일까. 풀벌레 소리 들리는 가을이다.
다리는 혼자서 갈 수 없는 곳을 스스로 건너가게 해준다는 점에서 교육에 비할만하다. 과학교육 또한 지식전달 위주의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체험을 통해 이루어져야 과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이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치열하게 보낸 여름의 끝. 그 끝의 시작은 어디일까. 풀벌레 소리 들리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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