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에서 울려 퍼지는 국가(國歌)는 1960년대 녹음된 낡은 음원이다. 중창이나 웅장한 악기소리 없이 단순한 멜로디만 흘러나오는 음악이지만 2019년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이런 캄보디아의 국가를 교향악단의 선율에 합창단의 목소리를 입혀 새롭게 녹음한 한국인이 있다. 2011년 캄보디아로 이주한 류기룡(49) 씨는 올해로 8년 째 현지 학생들에게 성악을 가르치며 생활하고 있다. 그는 캄보디아와 어떤 인연이 있어 타국의 국가를 연주해 녹음까지 하게 되었을까?
◆늦깎이 예술가
편안한 인상만 보면 평생 우아한 음악가로만 살아왔을 법한 류기룡 씨는 히스토리가 있는 남자이다. 학창시절 성악가를 꿈꾸며 음악 공부를 시작한 때부터 8년 간 예술단 행정가로 일한 경험, 그리고 현재 캄보디아 왕립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까지 다난한 인생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평탄하진 않았지만 항상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살아왔다. 내 나라가 아닌 타국의 국가를 연주하겠다는 생각도 그로부터 시작되었다.
류 씨는 성악가로서는 늦깎이로 출발했다. 어려서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전문적으로 배울 기회가 없어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남성중창단 동아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동아리를 지도하던 담임선생님은 음대로 진학하려는 류 씨의 열정을 높이 사 성악가인 자신의 아내를 소개시켜 주었다.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고 싶다는 류 씨의 요청에 사모님은 한 시간에 5천원 수강료만 받고 개인수업을 해 주었다. 그는 90학번으로 경북대학교 예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도 졸업을 할 즈음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지만 지금 가르치는 캄보디아 학생들에 비하면 자신은 훨씬 운이 좋은 편이었다. 많은 캄보디아 음대 학생들은 하루 생계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과 비교하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친구들 대부분은 성악의 본고장 이탈리아나 수많은 가곡이 탄생한 독일로 진로를 결정했다. 그도 비슷한 진로를 계획했지만 비용이 부담돼 유학을 포기했다. 이번에도 은사의 도움을 받게 된다. 지도 교수님은 88서울올림픽 당시 러시아 오케스트라를 서울로 초청해 공연을 가졌는데 그 인연을 제자에게 이어주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던 류 씨는 한 학기 학비가 400만 원이란 얘기를 듣고 러시아 유학을 결심한다. 차선으로 선택한 러시아행은 그에게 뜻하지 않은 경력을 선물한다. 러시아에서 배운 예술경영학은 향후 류 씨가 문화재단에서 일하는 발판이 되었다.
1996년 찾은 러시아는 그야말로 종합 예술의 극치였다. 최고의 발레단과 오케스트라, 유서 깊은 극장까지 예술의 천국이었다. 특히 대중을 위한 예술이 발달한 러시아에서는 '예술경영학'이라는 과목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무대 위에서 노래만 하던 그에게 예술을 경영학의 시점으로 공부한다는 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때부터 류 씨가 예술을 대하는 관점이 바뀌었다. 예술은 단순히 창작가들의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꿈을 가진 아이들의 기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여유라고 생각했다.

◆캄보디아와의 인연
류 씨는 2011년 우연한 기회로 캄보디아를 찾았다. 고생 끝에 마친 유학생활은 물론이고 여러 번 건강상의 고비가 찾아온 직장 생활까지 지난 20여 년 세월을 훌훌 털고 떠났다.
8년간 직장 생활은 다사다난함의 연속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생업에 뛰어들었지만 평생 음악공부만 하던 그에게 직장 생활은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대구 문화예술회관 행정사무단원으로 일하던 당시 딱딱한 공직 업무는 예술가인 그에게는 제약이 많았다. 예술 공연은 정해진 예산이나 틀에 맞춰 구성하기 힘든데 공무원 조직에 속한 단체이다 보니 일하는 방식도 제한되고 매번 원하는 성과물을 만들어내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입이 돌아가는 구안와사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도 했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안면 마비와 대상포진을 앓았다. 안정적인 직장이지만 몸을 혹사시킬 정도라면 그만두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일을 그만두고 한 달 정도 휴식기를 가졌다. 이 때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방문했는데 한 NGO단체에서 류 씨에게 성악을 가르치는 재능기부를 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캄보디아 왕립예술대학과의 인연도 이 때 시작되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학생이 모여 노래하는 모습에 감격한 왕립예술대학 총장님은 류 씨에게 남아서 아이들을 지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인프라가 없어서 그렇지 수업이 생기면 학생이 자연스레 모일 겁니다." 총장님의 말만 믿고 류 씨와 아내는 캄보디아 행을 결심했다.
◆학생들을 위한 프로젝트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실상을 보니 막막했다. 음악대학 재학생은 1명이었고 졸업생 2명까지 총 3명만 덩그러니 류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경도 매우 열악했다. 지금도 캄보디아에는 국립 오케스트라나 전용 극장이 없는데 학교에 음향시설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날씨는 푹푹 찌는데 온 사방에 먼지가 날리고 소음으로 가득한 교실에서 학생들과 수업을 했다.
사실 캄보디아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열악한 시설보다 더 큰 장애물은 이들의 음악에 대한 인식이었다.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노래를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실컷 창법을 키워 놓으면 학생들은 저녁마다 밤무대나 웨딩파티를 찾아다니며 5달러를 받고 밤새 노래를 부르고 수업은 필요할 때만 들어왔다. 류 씨는 아이들에게 성악을 열심히 공부하고 정식 예술인이 되면 일당 5달러가 아니라 50달러 500달러가 될 수 있다며 학업에 전념할 것을 독려했다. 열심히 노래와 한국어를 가르쳐 한국으로 유학 보낸 학생이 어느 농장에서 일하며 돈 벌고 있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가슴이 무너졌다.
그나마 교육적 성과가 없었더라면 류 씨와 아내가 8년씩이나 캄보디아에 남았을 리가 없다. 수업에 참석한 학생들의 실력이 날로 발전했고 금세 소문이 퍼지면서 스무 명 이상으로 늘었다. 학생들 실력도 날로 발전했다. 류 씨는 음악을 공부하는 캄보디아 학생들이 생계가 아닌 자긍심과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캄보디아 국가 '왕국(បទនគររាជ)'의 재녹음을 고안해냈다.

◆캄보디아의 새로운 국가(國歌)
류기룡 씨는 먼저 대학교 총장을 통해 만난 캄보디아 문화예술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중창단이 부른 다른 국가(國歌)를 들려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 녹음할 수 있는 공간도 찾아 나섰다. 캄보디아 현지에는 연주할 교향악단도 제대로 된 녹음실이 없어 국내 오케스트라와 장소를 동시에 물색했다.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한 나라에 울려 퍼지는 국가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연주자들이나 녹음 장소가 상당한 수준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정부가 음원 채택을 고민하겠다는 답을 전했고 경상북도에서 오케스트라와 녹음실 지원을 약속하면서 일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녹음을 마치고 내려오는 학생 중에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친구도 있었어요. 처음 노래를 시작한 때부터 조국의 국가를 직접 부르기까지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 거죠." 지난 13일, 학교선생님이나 직장인을 포함한 27명의 캄보디아 로얄합창단은 한국을 방문, 경상북도 청사에서 도립교향악단과 캄보디아 국가 음원 녹음을 마쳤다.
현재 새로운 캄보디아 국가 음원은 후반부 작업 상태에 있다. 경상북도와 캄보디아 정부 간에 협의한 프로젝트지만 실제 캄보디아에서 울려 퍼지기까지는 여러 실무 절차가 남아있다.
류 씨는 하루 빨리 새로운 캄보디아 국가가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전해지길 희망한다. 새로운 국가를 제작한 학생들 그리고 따라 부를 캄보디아 국민을 생각하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외국인인 제가 남의 나라 국가를 새로 녹음해 전하는 일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 또한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캄보디아 음악인들이 생계가 아닌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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