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국권 피탈 맞서 창의통고문 작성해 돌렸다 10개월 간 모진 옥고
친동생 여우룡 선생이 10개월 간 쇠약해가는 형 옥바라지하며 쓴 일기
석방 뒤에도 "일제 지배 복종 않겠다" 산 들어가 초근목피로 연명
"1월 21일. 맑다. 판결 날이다. 판사가 말하기를 '판결은 2개월을 감해 10개월로 정한다.' 형님이 말씀하기를 '머리를 끊을지언정 징역에 처할 수 없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 처역하는가? 너희 왕은 무도한 도적이라, 너희 왕의 머리를 벤 다음에 그만둘 것이다'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며 말씀하셨다. 일왕의 머리를 어느 때 베어서 하늘에 닿은 한을 씻겠는가?"
일제의 국권 피탈에 맞서 저항하다 10개월간 모진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 이은(二隱) 여채룡(呂彩龍·1866~1936) 선생의 동생이 쓴 '옥바라지 일기'가 95년의 세월을 넘어 재발굴됐다.
김천향토사연구회가 번역한 '소은일기'를 보면, 여채룡 선생은 음력 1924년 1월 21일부터 12월 1일까지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 "일본 놈들을 격멸할 때가 왔다. 합심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창의통고문(倡義通告文)을 작성해 유림들에게 전한 혐의였다.
이미 '일왕 10죄론'을 지어 배포하는 등 저항을 이어왔던 여 선생이 옥중에서도 결기를 잃지 않자 일제는 모진 고문과 구타를 가했다. '소은일기'에는 선생의 친동생인 여우룡(呂祐龍) 선생이 10개월간 쇠약해가는 형의 옥바라지를 하며 느낀 소회가 고스란히 담겼다.

일기를 발굴해 세상에 알린 건 여채룡 선생의 증손자 여환탁(61) 씨. 감시를 피해 친척집에 나눠 숨겨뒀던 일기는 1977년에서야 발견됐고, 이를 보관하던 여 씨는 최근 김천향토사연구회의 도움을 받아 번역, 책으로 출간하기로 했다.
여 씨는 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으로 음력 1924년 4월 20일을 꼽았다.
그는 "증조부의 안부를 묻는 증조모님께 '모습이 좋지 않다'고 대답하니 '떳떳한 일이니 염려치 말라. 의리를 믿고 세상에 나가 죽음과 삶을 돌아볼 수는 없다'고 대답하는 내용인데, 증조부모님의 굳센 심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며 "실제로 증조부님은 구타를 당하면서도 '살려달라'는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여채룡 선생은 힘든 옥고를 모두 치른 뒤에도 일제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 산에 들어가 9년간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영양실조로 타계했다. 이는 일본의 경제보복 사태를 맞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된다는 게 여 씨의 설명이다.
여 씨는 "일본의 경제보복 앞에서 친일과 반일로 분열해 싸우는 지금, 증조부님께서 살아 이 모습을 보셨다면 분명히 호통을 치셨을 것"이라며, "개인적 이기심보다 나라 사랑을 앞세워 단결하자는 게 당시 영남 유림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이었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친일과 반일을 넘어선 '극일'(克日)의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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