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숨은 이야기 <16> 음악이 흐르는 그림

입력 2019-07-15 18:00:00

파울 클레 작
파울 클레 작 '파르나소스 산으로'

파울 클레, 파르나소스 산으로, 캔버스에 유화, 100 x 126cm, 1932, 스위스 베른 국립미술관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들 가운데서 파울 클레(1879~1940)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영국의 현대미술사가 허버트 리드는 클레의 예술세계를 "유령과 도깨비의 세계이며 수학과 음악 요정의 세계, 꽃과 동물의 세계"로 정의한다. 그의 그림에는 추상적인 기호와 상징이 나오는가 하면 동물, 식물, 사람 같은 형상이 보이기도 하고 시적이지만 설명적인 요소도 전개된다. 요컨대 시적인 요소(서정적, 본능적, 직관적)와 건축적인 요소(분석적, 구조적)가 공존하는 데서 클레의 예술세계가 독보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다. 서정적 추상(칸딘스키)과 기하학적 추상(몬드리안, 말레비치)이라는 추상미술의 양대 계보에서 좀 비켜난 클레의 작품은 몽환적 또는 신비적 추상으로 불릴 수 있다.

클레는 스위스 베른 근교 뮌헨부흐제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독일인이다. 성악가이자 음악이론가인 그의 아버지는 베른음대 교수였고, 어머니는 성악가였다. 클레 또한 바이올린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열한 살 때부터 연주회를 정기적으로 열면서 베른음악협회 명예회원이 될 정도였다. 후일 실내악 연주회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릴리 스툼프와 결혼하면서 명실상부 음악가 집안을 이루었다. 그런 그가 대학입시를 앞두고 음악가가 되길 원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창조적인 작업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그를 화가의 길로 이끌었다. 클래식한 음악에 충실했던 연주자로서 클레는 이미 음악은 정점을 찍었다고 봤고, 현대음악에선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창조적 열망을 이룰 수 있는 분야가 미술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후 그는 음악과 미술 두 영역을 꾸준히 연결시키는 작업을 지속했다. 미술은 공간예술이고 음악은 시간예술이라는 통념을 깨고 그는 미술이 시간적인 요소를 지닌 만큼 음악도 공간적이라고 보았다.

''파르나소스 산으로''(Ad Parnassum)는 제목부터 음악적 감성을 환기한다. 그리스 중부 프티오티다 현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은 신화에서 아폴론과 아홉 뮤즈들이 시와 음악을 관장하던 곳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도 파르나소스 산이 잠깐 언급되는데,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젊은 시절 여기서 멧돼지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파랑, 오렌지, 초록 색면과 색점들 위에 흰색 점들이 촘촘히 중첩된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영롱한 모자이크를 연상시킨다. 중첩된 색채는 하모니를 이루고 연결된 선들은 멜로디가 된다. 이를 통해 다성음악(polyphony)과 같은 다층적인 회화가 펼쳐진다. 간결한 검은색 선으로 그려진 세모와 아치는 건축적 구조를 이룬다. 마치 관람자들이 문으로 들어와 뮤즈들의 음악이 흐르는 파르나소스 산으로 올라가라고 안내하는 듯하다. 오렌지색 원은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서서히 저물어 가는 태양처럼 보인다.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음악에 대한 예찬인 동시에 근심과 걱정이 없는 이상향(Arcadia)을 표현한 그림이다.

자신만의 상상의 작은 정원을 알뜰살뜰 가꾸듯 주로 작은 그림을 그렸던 클레에게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비교적 큰 그림이다. 바우하우스를 떠나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교수가 된 후 그는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안정돼 자신의 작업에 좀 더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그림에는 그런 안정감이 묻어난다. 시인의 심성을 지닌 음악을 사랑한 화가 클레는 마침내 파르나소스 산에 도달한 것이다.

박소영
박소영

클레에게 예술작품은 현실을 넘어선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1920년에 발표된 논문 '창조에 관한 신조'에서 클레는 "예술은 가시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은 가시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밝힌다. 즉, 예술은 보이는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적 사고를 가시적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렇듯 클레의 작품들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조형요소와 만나 씨실 날실을 직조하듯이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는 몽환과 논리, 시와 수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유아적인 치기와 세련미 같은 상반되는 요소들이 공존한다.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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