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온 서상만 시인이 열 번째 시집 '빗방울의 노래'를 펴냈다. 동시집까지 포함하면 열 세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 묶은 시편들은 유년의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오랫동안 병고를 겪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안타까움, 끝이 보이는 노년의 삶과 그 내면 풍경, 삶과 죽음, 시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관심 등을 토대로 하고 있다.
'등이 휘어
활이 되어가는 걸
나만 몰랐네
바람에 튕겨 나온
박피(剝皮)처럼
진종일 방에 앉아
화살만 닦는 궁사여'
-궁극- 전문
궁사는 활 쏘는 사람, 활을 쏘아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시인은 '진종일 방에 앉아 화살만 닦는 궁사'로 자신을 묘사한다. 부지런히 화살을 닦느라 세월 가는 줄 몰랐는데,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등이 굽어 활이 되어가고 있다. 큰 뜻 펼치리라 포부와 각오를 다지며 화살을 닦아 왔는데, 정작 활은 쏘아보지도 못하고 구부정하게 굽은 몸뚱아리를 발견하고 만 궁사의 심정이란….
'중랑천에 첫눈이 내렸다
맨발의 비비새는 쪼르르
발자국만 남기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둔덕 너머 마른 풀
벌써 바람에 모지라지고
길마저 다 지워졌으니
어쩌랴 나도 천생
그 비비새 발자국이나
그 마른 풀발 숫눈길을
섞바꿔 따라가면, 끝내
닿을 곳은 한 곳 아니리
나도 그렇게 다녀가마
가는 듯 머무는 듯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걸어서 (하략)'
-첫눈- 중에서

시인은 눈이 녹아버리면 비비새의 발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란 것도 곧 지워지고 말 한순간이라고 담담하게 노래한다. 그리 담담한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2연에서는 '그렇다 쳐도/ 우리들 발자국마저/ 다 지워지면/ 그 누가 이 길에 서랴'며 광활한 공허와 허무의 심정을 토로한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이제 머지않아 아내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담은 작품도 있다.
'여보! 이제 당신도
눈과 귀
다 닫혀버렸지요
조금만 기다려요
때 되면
공단 이불 둘러메고
토굴을 뚫고라도
귀신같이
잘- 찾아갈 테니'
-귀혼- 전문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육친)와 시인의 한평생을 포근하게 안아준 어머니(대지)를 하나의 존재로 그려내는 작품도 있다. 때로는 구차하고, 때로는 슬프고, 억울하고, 하찮기까지 했던 한생을 안아준 어머니(육친과 대지)에게 드리는 헌사다.
'흙은 어머니의 따뜻한 눈물이다
구차한 것들과 슬픈 것들과 억울하게도
하찮게 썩어가는 모든 것을 안아주니까
비바람 무작정 닥치는 계절 앞에서
탈 없이 우리들을 깨우고 잠재워 주면서
굶주린 새벽, 무참히 우리를 밟고 가는
타락한 동장군의 발굽 소리와
소리 없이 죽어가는 자유의 불청객에게
자성의 눈발을 끌어 덮어 우릴 보듬는,
그대 이름은 진정 흙이고 어머니기에'
-흙이여 어머니여- 전문
황치복 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서상만의 시는 노경(老境)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로서 독자적인 시적 영역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될 만하다' 며 '(중략) 노년의 삶을 다룬 그의 시편들이 풍요롭고 역동적이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형이상학적 통찰이라는 시의식의 깊이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시집은 모두 4부, 85편의 시로 구성돼 있다. 1부 친절한 길, 2부 아픈 잠자리, 3부 다시 피는 꽃, 4부 빗방울의 노래, 이다. 60쪽, 1만원.
▷ 서상만
경북 호미곶 출생. 1982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 시집으로 ▷시간의 사금파리 ▷그림자를 태우다 ▷모래알로 울다 ▷적소(謫所) ▷백동나비 ▷분월포(芬月浦) ▷노을 밥상 ▷사춘(思春) ▷늦귀 등이 있다. 월간문학상, 최계락문학상, 포항문학상, 창릉문학상,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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