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屛山書院)은 완만한 화산을 등지고 앞의 낙동강과 절벽 병산 사이에 자리해 강학과 수양에 좋은 곳이다. 절묘한 경치뿐만 아니라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한 뛰어난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조선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인 서원들은 선비들이 수양하고, 공부하기 좋은 자연적 환경에 자리잡았다. 더욱이 서원은 건축과정에 문중과 후학들의 정치 철학과 사상을 담아내고 있어 건축물 자체로도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설득·통합의 리더십의 서애 배향
병산서원은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을 모체로 건립됐다. 고려시대 풍산 류씨 집안의 교육기관이었던 풍악서당이 풍산읍 내 도로변에 있어 시끄럽고 공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1572년(선조 5년) 서애 류성룡(柳成龍·1542~1607)에 의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풍악서당은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1607년 재건됐다. 풍악서당이 서원으로 바뀐 것은 1614년(광해군 6년)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서애의 위패를 모시면서부터다. 서원은 1863년(철종 14년)에 조정으로부터 '병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병산서원은 서애와 그의 셋째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1582∼1635)을 배향하고 있다.
선조 5년(1572) 서애가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서애 문중의 강학을 위한 공간이었던 이곳을 광해군 6년(1614) 유림들이 서애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尊德祀)를 지으면서 비로소 서원의 위상에 올랐다.
병산서원은 철종 14년(1863)에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전국의 서원 47곳 가운데 하나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에 오른 서애는 대동법 모태인 '작미법'(作米法)을 시행했고,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무를 지웠으며, 천민들도 종군을 조건으로 면천해주고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줬다. 또, 이순신 장군과 권율 장군을 발탁해 후원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몸을 피하려고 하자 서애는 "임금의 수레가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벗어나면 조선은 우리 것이 아니다"라며 강력하게 제지하면서 국란 타개책을 세웠다.

◆만대루, 자연 정원의 풍미
병산서원은 지금 건축학도 사이에서 '꼭 찾아봐야 할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로 불리는 병산서원은 풍수학의 배산임수와 자연과의 조화, 수천 년을 꼿꼿이 서 있을 정도의 전통 건축방법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차경'(借景). 자연의 경치 그 자체를 빌려 건축물의 하나로, 또는 정원으로 쓰고 있다는 표현이다. 병산서원이 그렇다. 꽃봉오리 같은 화산을 '후원'(後園)으로, 절벽같이 펼쳐진 병산과 모래밭을 감고 흐르는 낙동강을 '정원'(庭園)으로 삼아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한다.
2층 누마루인 '만대루'(晩對樓)는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지었으며, 긴장된 수양생활의 피로를 풀기 위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만대루의 아름다움은 건물의 위용보다는 자연스러움에 있다.
2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만대루는 벽과 문, 창이 없어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대신 8개 기둥으로 만들어진 7칸의 공간은 사시사철 변하는 7폭 병풍을 보여준다. 병산의 푸른 절벽과 노송, 굽이치는 낙동강과 백사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대루 지붕 한쪽에는 북이 걸려 있다. 이 북은 서원의 3가지 금기인 '여자·사당패·술'이 내부에 반입됐을 경우에 울렸다. 산천경개를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던 병산서원 유생이라면 적어도 이 3가지 금기가 아쉽진 않았을 것이다.
◆인공의 흔적 지운 서원 건축물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復禮門)은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라"는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따온 말이다. 솟을삼문 앞에 서면 시선이 만대루를 거쳐 입교당(立敎堂)까지 연결된다.
대문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광영지'(光影池)가 눈길을 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둔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맞은편에 강당 건물인 입교당이 눈에 들어온다. 1.8m의 기단 위에 놓인 입교당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를 통해 낙동강과 병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스승과 제자 간에 가르치고 배우는 소통의 공간인 입교당은 전형적인 5칸의 강당 구성으로 가장 크고 견실한 건물이다. 3칸의 대청으로 된 강학당과 양쪽에 온돌방을 배치했다.
툇마루가 마련된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에는 서원의 원장이 기거했으며, 서쪽의 '경의재'(敬義齋)는 부원장이나 교수들이 머물렀다. 강학당은 유생들이 한 달 동안 자습한 내용을 구술로 시험 보는 강회를 위한 장소로 사용됐다.
병산서원은 입교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書齋)를 배치했다. 상급생 기숙사인 동재는 '거동을 바르게 하라'는 뜻을 담은 '동직재'(動直齋)다. 동재와 마주 보는 서재는 동재와 규모는 같으나 작은방에 책을 보관하는 방이라는 '장서실' 현판이 걸려 있다.

◆겸암·서애 두 형제의 삶은 '충'과 '효'
안동의 명문가인 풍산 류씨 가문은 '충효'(忠孝)를 가훈으로 삼아 실천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풍산 류씨 가문은 고려 말~조선 초에 풍산 류씨 류종혜가 안동 하회마을에 들어와 3년 적선(積善)으로 자리 잡은 이후 그의 5대손 입암 류중영(1515~1573년)이 중심이 돼 겸암류운룡(1539~1601년)과 서애 등을 비롯해 많은 학자와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특히 겸암·서애 형제가 퇴계 이황(1501~1570년)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대대로 가학(家學)을 형성했으며, 류성룡이 영의정이 되고 공신이 됨에 따라 풍산 류씨는 안동의 대표적인 명문가가 됐다.
두 형제는 항상 부모를 모시기 위해 번갈아가며 안동 근처 고을에서 벼슬살이를 했다. 임진왜란 때 서애가 영의정으로서 왕을 모시는 처지가 되자 형인 겸암은 벼슬을 그만둔 후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들과 피란하는 등 두 형제는 평생 '충'(忠)과 '효'(孝)에 힘썼다.
서애는 임종하기 전에 자손들에게 "충효 이외에 힘쓸 일은 없다"라는 유훈을 남겼는데, 그의 증손자 류의하(1616~1698)는 유훈을 받들어 당호를 '충효당'(忠孝堂)이라 이름 지었으며 이곳에서 자제들을 교육했다.
서애는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군 사령관) 등을 지내며 조정의 중추 역할을 했다. 전후 어린 시절을 보낸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가 더 이상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옥연정사에서 집필에 주력했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돼 전해오는 '징비록'(懲毖錄)도 이때 완성했다. 징비록은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삼가다'라는 의미로 임진왜란의 원인 및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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