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길 위에서

입력 2019-06-12 12:50:57 수정 2019-06-12 15:50:55

박용욱 신부 대구가톨릭대 의과대학 윤리학교실 주임교수

버스를 탄다. 뒷문 앞쪽으로는 교통약자석이라 앉을 일이 없으니 눈길을 줄 필요가 없다. 다행히 두 명씩 앉는 뒤쪽 좌석들에는 한 사람씩만 있어서 앉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자리에 앉느냐는 것. 2인용 좌석에 죄다 복도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창가 쪽으로 앉아 있으면 뒤에 탄 사람이 쉽게 앉겠는데, 굳이 복도 쪽에 앉는 것은 어지간하면 내 옆에 앉지 말라는 뜻일까. 뒷사람에 대한 배려 따위는 기대하지 말라는 투다. 운동하는 셈 치고 차라리 서서 가는 편이 마음 편하다.

늦은 시간, 버스가 학원 앞을 지난다. 학원 문 앞에는 자녀를 데리러 온 차량 행렬이 늘어서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황색 실선을 끼고 있다. 운전면허를 따려면 기본적으로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차선의 용도인데, 황색 실선은 아시다시피 기본적으로 주정차 금지 구역이다. 물론 황색 실선 구역이라도 장소에 따라서 주정차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시간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주정차가 금지되는 복선의 황색 실선 옆까지 정차하는 것으로 봐서, 줄지어 선 저 행렬들 중에서 도로 규칙을 신경 쓰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비상등만 켜고 있으면 '짐이 곧 법이요 국가'라는 왕실의 일족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사랑하는 내 자녀가 이 경쟁사회의 살벌함 속에서 상승의 사다리를 타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끼고 편안해지는 것이 중요하지, 그깟 규칙쯤이야 안중에도 없다는 태세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까지 점령한 승용차들 때문에 버스 기사님은 오늘도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을 선보인다.

스페인의 가톨릭 성지 산티아고 데 캄포스텔라로 향하는 한국인들의 발길도 범상치 않다. 성지를 찾는 외국인 그룹 중에서 동양인으로서는 독보적이고 세계적으로도 아홉 번째로 많은 이들이 야고보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가톨릭 국가도 아닌데 왜 그리도 많은 한국인들이 그곳을 향하는지 의아한데, '자아'를 찾아서 가는 것이란다. 그 '자아'가 왜 하필이면 머나먼 스페인에 있는지 더 궁금하다.

그런데 자아를 찾아갔다는 사람들 중에서 여전히 남들이 맛있다는 맛집과 남들이 편하다는 알베르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는 소식이다. 심지어는 순례객들이 공동으로 써야 할 부엌조차도 한국인이 나타나면 마비될 지경이란다. 남들은 달랑 냄비 하나로 단출한 파스타를 준비하는데, 우리 순례객들은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전까지 부치니 도무지 다른 나라 사람들은 부엌을 쓸 재간이 없다. 어디 그뿐이랴. 지친 순례객이 쉬어야 할 밤 시간에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를 푸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어쩔 것이며, 스페인의 시골길에 굴러다니는 빈 소주팩과 컵라면 용기는 또 어쩔 것인가.

그리스도교 영성은 인생을 하느님께 가는 순례길로 여겼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길 위에서 하느님을 만났다. 그러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언제나 외롭고 정처 없는 발걸음일 필요는 없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배려를 베풀고 정을 주고받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을 만난다. 우리가 걷는 모든 길이 하느님께 가는 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다른 이들과 함께 동반하고 동행하는 지혜와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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