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창설 "경북인 전체 10%가 넘는 80여명 활동"

입력 2019-04-10 15:41:00

일본군 징집됐다가 탈출한 경우 가장 많아

광복군의 훈련 모습. 경북도 제공
광복군의 훈련 모습. 경북도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한국광복군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인도·버마 전선에 인면전구공작대를 보내 영국군을 도와 공동작전을 수행했으며 미국 OSS(전략첩보기구)와 합작해 국내 진공을 준비했다.

한국광복군에 참여한 경북인들은 80여 명으로 전체 광복군의 10%가 넘는다. 이처럼 경북인들은 나라를 되찾고, 민국(民國)이 뿌리를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징병·징용에서 탈출해 중국의 여러 곳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웠다.

초기부터 활약한 인물은 김경화(문경), 김봉식(경주), 김상준(김천), 김영진(봉화), 민영숙(상주), 박영진(고령), 박재화(영천), 양민산·오서희(의성), 이정호(대구), 이진영(영천), 전월순(상주), 황영식(영일) 등이 대표적이다.

광복군에 참여한 경북인들의 특징을 보면 일본군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확인된 사람만 30명이 넘는다. 또 중국군이나 중국유격대에 들어가서 활동하다가 광복군으로 넘어온 인물도 여럿이다.

활동으로는 전장에 참여할 군인을 모집하는 '초모공작'(招募工作)이 가장 많았다. 광복군에 참여했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목숨을 잃거나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돌아온 이들도 적잖았다.

광복군 대표들의 기념 촬영 모습. 경북도 제공
광복군 대표들의 기념 촬영 모습. 경북도 제공

김영이(상주)·이응락(영주)은 전사하고, 류시훈(안동)도 작전을 펼치다 목숨을 잃었다. 정태희·정윤희 형제(고령)는 산서성에서 초모공작을 벌이다가 일본군에게 잡혔으며 동생 정윤희는 순국하고, 형은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김만식(상주)은 3지대에 들어가 초모활동을 펼치던 중 일본군에 붙잡혔다가 고초 끝에 다시 탈출했다. 오학선(달성)은 미군 조종사 구출활동을 폈다. 3지대 창설 요원인 김영진은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상해지역으로 투입돼 초모공작과 자금모집을 펼치다가 붙잡혀 단기 3년, 장기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고 6개월 만에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임시정부 요인들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어 1948년 8월 15일,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민주독립국가 대한민국을 재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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