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했다

입력 2019-04-10 06:30:00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지난 2014년 83세를 일기로 작고한 A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고교 졸업 후 고향인 경북 북부지방의 한 군청 수습 공무원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안 돼 6·25가 터졌고, 그의 고향을 점령한 인민군은 낙동강 전투에 투입할 의용군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A씨는 이를 피해 숨어 지냈으나 개천에 몸을 씻으러 나왔다가 발각돼 의용군 행렬에 서야 했다.

그렇게 끌려가다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도망쳐 고향으로 몰래 들어왔다. 그 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A씨의 고향도 수복돼 국군 3사단 예하 연대가 진주했다. A씨는 이 부대의 행정 보조 인력으로 '징발'돼 강원도 철원까지 갔으나 1953년 초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로 3사단이 궤멸하면서 걸어서 태백산맥을 넘어 강릉까지 후퇴하는 등 갖은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생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고향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중 1961년 쫓겨난 것이다. 5·16 직후의 '병역 미필자'의 공직 추방 조치 때문이다. 3사단의 군번 없는 군인이었다고 호소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를 입증할 기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년 뒤 '구제'되긴 했으나 '병역 미필자'라는 낙인은 그에게 평생의 한이 됐다.

비군인 참전자도 두 사람의 인우(隣友)보증이 있으면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제도가 1995년 시행되면서 마침내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하지만 이것도 엄청난 인내를 요구했다. 같이 근무한 군인들이 어디 사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소문 끝에 그들을 찾아 2003년 '국가유공자증'을 받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무려 8년이 걸렸다.

부친이 특혜를 받아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는 야당의 의혹 제기에 손혜원 의원이 지난 4일 SNS에 '니들 아버지는 그때 뭐 하셨지'라고 쓴 뒤 SNS에는 '우리 아버지는 이렇게 했다'는 내용의 글이 대거 올라왔다고 한다. 기자도 한마디 해야겠다. "손 의원 부친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기자나 기자의 아버지는 유공자로 선정되려 로비를 하거나 특혜를 받지는 않았다"고 말이다. A씨는 기자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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